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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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면서 부활의 복음을 전한 사람들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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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6-12-27 ㅣ No.10896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나 지금이나 동서양을 두루 포함하여 때때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호(自號)를 지어 부르곤 하였다. 곧 자신의 의지나 취향, 인생관을 담아 자신의 칭호를 스스로 지었단다. 어떤 면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자호를 지은 셈이다. 어느 신부님께서 신학생 때 피정을 지도한 어느 노사제의 당부가 기억난단다. “사제 생활 40년 동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신학생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 사실만큼은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각자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요한 사도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의 한 분이시다. 어부 출신인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사도야고보의 동생이다. 형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불려 지며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 자주 계신 제자이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2-8)

 

이렇게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빈 무덤 이야기를 듣고는 예수님 무덤으로 달려간다. 이처럼 복음 모두가 달리는 것으로 부활의 목격 장면을 전한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마르 16,8)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루카 24,12) 이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마리아 막달레나 여인도 막 달렸다. 베드로도 달리고 사도 요한도 그렇게 달렸다.

 

유명한 종교 박물관 곳곳에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들이라는 그림이 걸려있다. 부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동트는 새벽녘의 두 제자의 달리는 모습이다. 뒤로 흩날리는 옷이랑 머리카락은 속도감을 실감케 하면서 얼마나 빨리 달려가는지를 보여 준다. 사실 두 제자는 돌아가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애타는 심정이 담겨 있다. 갈색 옷의 베드로는 눈물을 머금고는 그의 평소 성격처럼 조급함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를 앞질러 달려가는 제자가 요한, 그의 옷은 아침 여명의 빛을 모두 흡수한 흰색이다. 그의 눈과 꼭 모아 쥔 두 손에는 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가득하다. 주님의 사랑을 가득 받아 본 사람의 모습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을 본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며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던 두 제자가 텅 빈 무덤을 만난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제로로 영이 되는 순간이다. 보이는 것은 텅 빈 비움이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보고서야 믿는 기운이 되살아 난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 준 텅 빈 존재에 오로지 사랑만이 남기 시작했다.

 

비록 그 부활의 증언 목격담이 다 다를지라도 그건 진리이다. 그 덕택에 우리는 이렇게 믿음의 현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목격자들의 진술내용이 하나같이 같다면 그건 신비가 담긴 부활 신앙이 아니다. 그건 밋밋한 현재의 생활 그 자체이다. 부활 목격자의 증언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 자체가 신비이다. 이 신비의 중심엔 영생이라는 미래의 벅찬 희망이 있다.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나에게도 분명히 적용되는 꿈이요 희망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부활의 이 기쁜 소식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알려야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달리면서 부활의 복음을 전한 사람들을 따라 믿음의 길로 들어선 신앙인이다. 이 소식을 확인하려고 여러 사람이 달렸다. 두려우면서도 기쁨으로 달렸다. 우리도 달려야 한다. 달려가서 이 기쁜 소식[복음]을 만민들에게 전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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