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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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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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1-19 ㅣ No.109492

 

2017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히브 7,25─8,6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

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르 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 담임 선생님께서는 산수
(요즘에는 초등학교에서도
수학이라고 하지만,
제 때는 산수였습니다)
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중학교 올라가서 제일 힘든
과목이 수학이기 때문에 지금
6학년 때에 산수를 열심히 하면
중학교에 가서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쪽지 시험을 자주 보셨고,
한 문제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때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를 포함해서 제 친구들은
다른 공부는 하지 않아도
필사적으로 산수 공부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맞는 것이 싫었으니까요.
때리는 선생님이 무서웠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점점 더 산수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숫자만 보면 괜히
움찔하게 되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팠습니다.
이제 중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답이 틀렸다고
매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제 담임 선생님이
수학 담당인 것입니다.
실망이 컸고 괜히
짜증도 났습니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 모습과 달랐습니다.
때리거나 윽박지르지 않으셨고
 대신 쉽게 가르쳐 주시면서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서웠던 선생님이 아니라
저의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선생님이신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 되었습니다.
공포 분위기로 성적을 올리는 것과
스스로 좋아하게끔 만들어서
성적이 올라가는 것,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의 것이겠지요.
공포 분위기 안에서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싫어도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공포 분위기에서 우리가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게끔 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실 주님으로부터 어떤 공포심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든 사람이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듣고서 기뻐하시거나
어떤 반응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바로 사랑이 없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은 공포 속에서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뿐
사랑으로 응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자그마한 잘못에도
나에게 벌을 주시는 분,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무서운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공포 속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주님께서는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울려 퍼지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공포가 아니라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름 자체가
큰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일상적인 것
너머로 나를 데려다 주는 것.
이름조차 없었을
순간들을 빛나게 해 주는 것.
(무무)
제주도의 돌하르방.
"검은 점 하나."
어떤 회사가 매출 급감으로
위기에 놓였습니다.
모든 직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갖게 되었지요.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 챈
회사 사장님께서 전 직원을
불러 모은 뒤에 하얀 수건에
 검은 점을 하나 찍은
수건을 보여주며 묻습니다.
“자, 여러분 무엇이 보입니까?”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검은 점이 보입니다.”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사장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검은 점만 보이십니까?
그런데 이 검은 점 이외에는
모두 흰색이 아닙니까?
왜 흰색은 보지 못하십니까?”
그리고 계속 말씀을
이어서 하십니다.
“지금 우리 회사의 어려움은
 이 검은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흰색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회사에도 더 밝은
미래가 많은데 왜 그 흰색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흰색을 볼 수 있다면
우리 회사는 다시 예전처럼
호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았던
 글의 내용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작은 검은 점 하나만을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쉽게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작은 검은 점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하얀
바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희망을 발견할 것이고,
 이 희망을 통해서
지금의 고통과 시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작은 점 하나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대신 그 작은 점을 둘러싸고 있는
 넓은 흰색 바탕을 바라보면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되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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