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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눈이 갔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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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01 ㅣ No.109768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눈이 갔다

 

- 윤경재 요셉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6,2~6)

 

 

 

구정 연휴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하는 2월입니다. 명절에 고향을 찾거나 여행을 다녀오면서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짜증스럽고 고생 좀 하셨나요? 최근 연구에 따르면 도로가 정체되는 이유가 꼭 차가 많아서라기보다 고속도로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 통행량에 훨씬 미달해도 정체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가끔 꽉 막힌 도로를 만나면 앞부분에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느 정도 벗어나면 사고 현장은커녕 뻥 뚫려 시원스레 달리는 경험을 한 적이 많습니다. 이런 현상을 유령정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몇 가지 밝혀졌습니다. 첫 번째 이유가 끼어들기라고 합니다. 줄지어 달리다가 옆 차로가 잘 빠지는 것 같으면 차로 변경을 하게 되고 그때 뒤에서 쫓아오던 차가 브레이크를 밟게 됩니다.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으면 그 다음 차량은 놀라서 속도를 더 줄이게 되고 이런 현상이 몇 대 연속해서 일어나면 결국 정체가 됩니다.

 

옆 차로가 잘 빠지면 나만 뒤쳐진다고 생각해서 손해 보고 싶지 않아 차로를 변경하는 심리를 손실 기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차로 변경을 해보지만, 모든 사람의 심리가 비슷하므로 도착하는 시간은 결국 전체가 비슷하게 늦어진다는 게 과학적 실험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매달리면 전 공동체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는 진리가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비단 도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국정농단 사태가 이런 사실을 증명합니다. 국가 부패지수가 높을수록 국민소득이 낮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나라가 발전하고 온 국민이 평화롭게 살려면 국민이 정직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뇌 생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 두뇌의 무게는 성인 체중의 약 2%1.4kg 정도이나 두뇌가 사용하는 혈류량과 산소 소비량은 하루 필요량의 약 20%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과도한 두뇌 사용 대신 집중과 분산의 방법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을 매번 처음부터 다시하면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사용하여 새로운 생각을 덧붙여 나갑니다. 또 어떤 생각을 습관화하거나 패턴화 하여 에너지 사용을 절약하려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고 정의 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반드시 참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가 주장하던 자유방임주의와 인간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하는 것은 이제 상식적인 내용이 되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주어진 자료를 합리적으로 종합하여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가능한 심적 노력을 덜 들이고 절약해서 신속하게 판단하고자 하는 인지적 구두쇠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 고향의 친지들이야말로 옛 기억에 빠져 새롭게 변한 예수님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 놀라운 지혜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합리적 의심이 아니라 편견을 지속하려고 하였습니다. 기껏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라고 감탄하더니, 그만 인지적 구두쇠에 빠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누구의 ~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그런 폐쇄된 관점으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마치 광대한 우주를 깡통에 담으려는 시도나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니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자기를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는 꼴을 못 봅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비교당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막상 도움을 받았어도 자신이 꿀리고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손실 기피심리가 여기서도 작동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맺자고 요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마음을 닫았습니다. 마음을 닫은 곳에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에 눈이 더 갔습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본문에 형제로 거명된 야고보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첫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이 모두 의인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AD62년경에 대사제 아나니아스의 명령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사랑과 충정을 보고 깨달아 변했듯이 예수님 부활 이후 많은 고향 사람과 친척들도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말하는 이 사건 이후의 일까지 통찰하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라야 성부의 오묘하신 뜻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스스로 정답을 내리려는 데에 걸림돌이 놓여 있습니다. 한 번 더 묻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 뜻을 따를 것인지,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인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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