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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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를 바꾸어야만 오늘 풍요로운 기쁨을 / 연중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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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2-01 ㅣ No.10976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불교 선종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마조 선사이다. 도를 터득한 그가 잠시 고향에 들렀는데 이웃에 살던 한 노파가 보고, “나는 무슨 대단한 양반이라도 와서 이렇게 소동이 났나 했더니 바로 쓰레기 청소부 마 씨의 아들 녀석이 왔구먼!”하더라는 거다. 고향 할머니는 세월이 변하고 달라졌는데도 어린 시절의 그 꼬마로만 여긴 거다. 이 소리에 마조는 반은 장난, 반은 감상적으로 그 유명한 즉흥시를 지었단다.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선의 황금시대에서)’

 

안식일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놀랐다. “저 이는 어디서 저것을 얻었을까? 저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이는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여기에 사는데?” 그러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를 고치시고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시며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1-6 참조)’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계셨다가 이제 안식일에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비슷하면서도 두 지역 서로 묘한 대조이다. 두 회당에서 모두 놀라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진 것에는 놀라지만, 고향에서는 자기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르침의 능력에 몹시 놀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 차이 결과도 대조적이다. 카파르나움에서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는데, 정작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는 몇몇 이들의 치유밖에는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두 지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다를까? 고향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선입관 때문일 게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학벌이 변변찮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능력을 지닐 만한 직업도 가문도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것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또는 이들을 바라볼까? 우리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익숙함은 때로는 너무 쉽게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의 아주 익숙한 것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이 편견에 잡혀서 진실을 못 본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 ‘고정 관념탓이다. 그분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다. “저 이는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등과는 형제간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수군거린다. 못 믿겠다는 말이다. 기적의 소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저들의 저 무시무시한 편견에 놀라신다. 그것은 이미 굳어진 고정 관념과 편견이 변화를 허락지 않기에.

 

오늘 나자렛에서 예수님 맞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미성숙한 모습이 엿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그분을 보아 온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큰 명망을 얻고, 권위 있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칭송하다 보면, 함께 자라 왔지만 비교되는 자신들의 초라한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지도 모른다. 하느님 기적은 그 능력이 나를 움직일 수 있음을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내 모습이 편견과 아집으로 굳어진 고집불통의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참 좋겠다.

 

이웃과 따스한 정 나누고, 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은 우리의 평범한 하루하루 생활에서는 아주 소중한 체험들이다. 이 일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로 거기에 소중한 구원의 현실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게다. 깨어 있는 신앙인은 비록 익숙하고 작은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도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의 구원을 느끼리라. 이렇게 지난 일을 지나간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다. 그렇게 해서 힘든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는 삶이리라.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은 퇴보다. 변화의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다. 아픔을 겪지 않고는 변화는 영영 싹트지 않을 게다. 고향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주님 기적으로 풍요로움을 체험했으리라. 우리도 그분의 그 기쁨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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