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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은 그때가 아닌 지금 이 시각에도 / 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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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3-06 ㅣ No.11053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예수님을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언제나 어루만져 줄 분으로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그분을 우리가 도와드려야 할 신세인 것 같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는, 헐벗고 굶주린 이가 바로 당신이라기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나.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다.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니.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지나쳤던 가난한 이들이 다 예수님 당신이었단다. 기절초풍 할 노릇이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 현존을 깨달았다는 게 이제 겨우 실감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온전히 가난한 이들께 바치지는 못하여도, 적어도 주님만은 가까이에 모셔야 할 게다. 위아래 방방에 예수님 달린 십자고상만 있다고 꼭 주님을 모시는 게 아니다. 매일 주님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도 그분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보다 못한 작은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때에야 비로소 함께하는 것이리라.

 

하느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그날에 우리를 왼편오른편 편 가르실 때에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지를 보기보다는 우리가 타인을 위해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를 카운터 하신단다.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아 용서를 청할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보다는 얼마나 진정한 마음으로 작은이에게 다가갔는지에 그 참가치를 두자.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생각한다. 얼마나 계명을 잘 지켰는가?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었는가? 얼마나 죄짓지 않고 살았는가? 이러한 것이 저 세상 어딘가에서 우리가 받을 최후의 심판 기준일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는 그러한 것은 아예 한 마디도 없다. 교회의 직책에 대해서도, 숱한 이들께 전도한 건수도 찾을 수 없다. 오직 이웃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들에게 과연 당신 대하듯이 한 것인지만 따진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어떠한 죄와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헤아리시기보다는, 타인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었고 또 얼마나 이해타산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 그래서 이제라도 저지른 죄보다 얼마나 이웃을 위하고 또 진정성으로 선행을 했는지에 그 가치를 꼭 두어야겠다.

 

가끔 어떤 이는 영생과 심판에 관해 이렇게 말하더라.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만 만족한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의 삶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일이 일체 없으리라. 자신이 만든 스스로가 홀로된 모습인지, 아니면 그 누군가와 공감하는지를 곧장 아는 그때가 바로 심판이리라. 그래서 이미 자신만이 지금까지의 심판자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참 의미 있는 풀이이다. 그렇다. 지금 베푸는 선행이야말로 악행을 이겨내고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마음의 초점이 늘 악행에만 머무르기에, 평생 악행과 싸우는 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리라. 그러나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하는 이는 자신의 온 삶이 선을 쌓으려는 의지로 향하기에 어느덧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게다. 그 언젠가 삶의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 의로운 이로 인정받으려면, 지금 이 시각 악을 피하려하지만 말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작은 이를 찾으려는 부단한 의지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할게다.

 

주변에는 외롭고 지친 이들이 참 많다. 따스한 이의 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자. 아무리 주님 계명을 많이 안다 하여도 사랑 실천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허공에 떠다닐 것이기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할 수가 없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가장 작은 이들도 사랑할 수밖에. 이번 사순에는 어렵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 봉사를 정성껏 하도록 마음을 다져야 하겠다.

 

그때나 지금 이 시각 그 기준은 이웃에게 얼마나 희사했는가가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가장 평범하고 작은이들께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가 기준이 될게다. 곧 보잘것없고 굶주린 이들께 먹을 것을, 목마른 이들께 마실 것을, 나그네와 병자들을 살폈는지가 되리라, 그들을 예수님처럼 귀하게 여겨 따뜻이 맞는 사랑실천으로 우리믿음을 증언하자. 최후의 심판은 그때가 아닌 지금 이 시각에도 도처에서 이루어진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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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작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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