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하지 않아야 한다

스크랩 인쇄

김리원 [silver0824] 쪽지 캡슐

2017-03-26 ㅣ No.111020

 




2017년 가해 사순 제4주일


<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


복음: 요한 9,1-41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저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학교 들어오기 이전에 찾던 행복의 개념은 소유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돼야 하고 높이 올라가야 하며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해야 행복하다 믿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낮에는 공장에서 운전기사를 하고 밤에는 과외를 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지갑에 그렇게 많은 돈을 넣고 다니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남은 대학기간의 등록금을 다 벌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손짓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돈 버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으며 여자와의 관계도 복잡 미묘한 미로처럼 행복을 준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영학을 공부하며 돈 몇 십 원 절약하자고 사람들을 이리 이용하고 저리 이용해야 한다는 식의 내용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역겨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시선이 변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대학 들어가면서 읽기 시작한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란 책 때문이었습니다. 군대에 가서까지 거의 5년을 읽었더니 새로운 눈이 생겼습니다. 그 책은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저의 행복에 대한 생각과 완전히 반대되는 삶으로 행복을 찾는 이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과 그분을 따르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던 사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삶이 행복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이젠 세상에서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이 역겹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어떤 눈이 저에게 생긴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오히려 고통이라는 것을 조금은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유의 삶에서 나눔으로의 삶의 전환은 커다란 희생이 따랐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자퇴해야 했고 아버지로부터 반대를 받아야 했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인간이라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오늘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에게 눈을 만들어주실 때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에 그가 버려야 했던 이전의 삶이었음을 압니다. 새로운 눈을 갖기 위해서는 이전의 눈은 버려야합니다. 이것을 자존심이라 부르기도 하고 동물의 소유본성이라 부르기도 하며 자아이기도 하고 뱀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 눈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늘이 떨어져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눈이 생기면 더 이상 장님의 삶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신학교 들어오고 난 이후로는 다시 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추구하던 행복을 등지고 신학교에 들어오니 주님께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성체를 영할 때였습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그분의 목소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은 눈을 만들어주실 때 바로 그 앞에 서 계시지 않습니다. 소경이 새로운 눈을 받은 사람답게 행동한 후에야 그분을 뵈올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잘 읽어보면 소경이 자신의 눈을 만들어주신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을 의회에서 증언하고 쫓겨난 이후입니다. 소경은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눈을 띄워준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실 수밖에 없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그리고는 의회 밖으로 쫓겨납니다. 새로운 눈을 뜬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반대되는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런 눈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왜 어떤 사람들에겐 그렇게 눈을 띄워주고 어떤 사람들은 장님으로 남겨두시는 걸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새로운 시각을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경영학을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난해져야 행복하고 십자가의 삶이 행복임을 말하는 책을 멈추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이유가 행복하기를 멈추지 않고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누구나 다 행복을 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미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면서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쓴 책에서 그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행복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카포라고 불리는 유태인 숙소 대표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음식과 고기, , 담배 등이 제공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오늘을 즐기고 독일 군인들을 대신하여 동료 유태인들을 괴롭히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내에 있는 유태인들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잘 먹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태생소경입니다. 스마트폰은 스스로 작동할 수 없듯이 인간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이 늑대라고 여기며 늑대처럼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모기는 피만 빨아먹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배고픈 사람을 위해 지독한 배고픔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빵을 나누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처럼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그들의 삶에 만족한다면 절대 더 완벽한 행복으로의 이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용소에서 카포 노릇을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남의 생명을 구해주려는 이들을 어리석게 바라봅니다.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그들에겐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족하고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눔의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행복을 불행으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그 가련한 행복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전히 행복해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얻은 권력과 부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눈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엔 돈을 많이 벌어도 많은 쾌락을 누려도 큰 권력을 얻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배가 고픈 이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비어있음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만이 새로운 눈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강의를 하며 신자분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하다고 손을 듭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당에서 그분들이 주님께 기도하는 소리를 만약 들을 수 있다면 더 큰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고 더 성공하거나 더 건강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대부분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피를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삶,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순교의 삶이 참 행복임을 볼 수 있는 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습니다. 행복하지 말아야합니다. 수용소에서 행복한 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수용소에서 나와서의 삶이 있고 그 안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삶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삶에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어떤 약에 취해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행복이 행복이 아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합니다. 행복하면 안 됩니다. 그 새로운 눈으로 세상 것을 버리고 세상과 맞설 수 있을 때에야 예수님은 그 사람은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참 행복임을 확증해주십니다. 행복이 오로주 주님뿐임을 알기까지 행복을 찾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무르셨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모시려했지만 오직 자캐오만이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돈에 신물이 나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상 쾌락이 역겨워 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만 모시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도 충분히 행복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순결한 삶을 원했던 사람입니다. 새로운 눈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행복임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러면 세상 것을 바라보던 그 욕망의 눈은 빼어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세상 것을 아직도 바라고 추구하고 있다면 다른 것을 바라볼 영적인 눈이 없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 같은 세상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임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합시다. 이 세상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소경이 되어버린 그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다가가서 새로운 눈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태생소경이 됩시다. 주님이 진흙을 들고 앞에 서 계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727 3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