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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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우리는 왜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할까요----요한 타울러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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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대 [yongdae_kim] 쪽지 캡슐

2017-04-30 ㅣ No.111753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요한 8,7)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의 현재 상태를 알게 해주고

 

여러분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나의 이 강론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우리의 구세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8,7)

 

그런 다음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난에 대하여 관상하는 시기입니다.

 

쉬지 말고 골고타에 관한 이 거룩한 책을 펴서 읽고

 

여기서 모든 위로와 진리와 지혜와 충고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귀중한 책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

 

어떤 책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수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행규칙과 수행방법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부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이 때문에 바오로 성인은 오늘의 히브리서(9,11-12)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어제도 그랬듯이

 

우리의 이 대 사제를 영원히 제대로 따르도록 합시다.

 

모든 일에서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영광만 찾읍시다.

 

 

 

우리의 대 사제이신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능하심과 비천하심을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어

 

오늘도 모든 인간을 돌보시고

 

모든 인간의 말과 일과 생각을 관장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만드신 한 사람에게서도 눈을 떼시지 않고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셨고 지켜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다름을 아시고 우리 모두의 얼굴을 보시고

 

우리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시어

 

우리의 생각과 습관을 보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온 인류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시면서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빠뜨리시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되돌려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모든 일에서 아버지의 영광만 찾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친구라면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려드린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진정한 친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무리 괴롭더라도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되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대 사제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또 하나는 당신의 인간성입니다.

 

아버지의 영광만 찾으려고 하셨기 때문에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극심한 수난을 받으시는 등의 미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참고 견디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모두 어떤 고통도 달게 받아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를 찾고 섬기기로 맹세하고 서원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진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하느님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만 그리스도를 섬기지 말고

 

모든 일에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이 때문에 자기 이익만 찾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아야 하지만

 

이들처럼 주님을 섬기려고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어떤 일에서도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그레고리오 성인(St. Gregory)은 아침 미사 강론에서

 

우리 모두 자신이 제 자리에 서 있는지, 기복신앙을 믿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마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 하는 등의

 

성찰(省察)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만 생각하고

 

욕정(欲情)을 버리고 이 세상의 명예를 멀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으면서 자신이 깨어 있는가를 성찰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여

 

귀로는 듣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을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말씀과 성령님과만

 

대화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성자(聖子)와 성령님과는 대화할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직접 대화할 수 없으므로

 

성자(聖子)와 성령님을 통하여 대화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말씀을 비슷하게 알아듣더라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혼 깊은 곳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과

 

너무나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만들어졌습니다(* 역자 주; Capax Dei).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말씀에게

 

말씀하시면 백 배나 빠르게 전달됩니다.

 

따라서 영혼의 내면의 귀가 들으려고 귀를 기울일수록,

 

영혼이 말씀과 하나가 되어 조용히 있을수록

 

말씀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영혼 안에 아무리 깊이 숨어계시더라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영혼에게 전달하시어 이해할 수 있게 만드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아버지의 말씀이지만

 

우리는 당신의 말씀처럼 듣는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혼 안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면

 

내면의 귀에 즉시 전달되기는 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몰라

 

무엇을 해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려고만 하면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기는 했으므로 의지에게

 

내가 그대를 가르쳐서 인도할 테니

 

정신 차리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는 의지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 다음 말씀은 더 깊은 곳 즉 갈망으로 울려 퍼져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방해하는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풍족하게 가져 마음대로 펑펑 쓰려고 하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 다음 말씀은 철학자들이 화를 잘 내면 후회하게 되므로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게 하시려고 말씀께서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참을성과 온유함 같은 덕을 쌓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효력이 먼저 여러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얼마나 미쳤는가를 알아본 다음

 

영혼의 다른 능력에도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러분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는지

 

알 수 있는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요한 8,7)

 

 

 

그런데 어떻게 하면 항상 이 말씀안에서

 

말씀을 놓치지 않고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시공을 초월하여 하신

 

말씀을 영혼의 내면에서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있는데

 

어떻게 말씀에게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수행을 한 고귀한 영혼들은 살아 있는 한

 

덕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 안에서 말씀을 듣는 순간

 

모든 외적인 능력을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지켜봅니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게 되면

 

곧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수행하여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들만이

 

자신의 영혼 안에서 말씀을 듣고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더욱더 고행하고 고통을 겪게 하시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불행이나 기쁨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은 지우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훈계하실 때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든 사람들을 통해 주시든,

 

모든 고통을 기쁘게 지고 있다가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며 모든 슬픔을 하느님의 발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대 사제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덤덤하게 피를 흘리시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네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진심으로 회개함으로써

 

영육(靈肉)으로 고행(苦行)하며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즉시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는 참회의 필수 요건으로, 죄를 더 이상 짓지 말고

 

진심으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들에서 기쁨을 찾았던 만큼

 

괴로워해야 하며 우리의 피는 죄와 싸우다가 죽은

 

쾌락의 죽음에 뿌려지게 됩니다.

 

이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몸이 튼튼하게 되지만,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데 흘리게 되므로

 

몸은 야위게 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아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미 고행(苦行)을 통하여 많이 단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충격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적 기쁨만 맛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피를 흘리게 된 것은 하느님의 친구들이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피할 수 없으면 담담하게 이 고통을 견뎌낼 수밖에 없습니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은 숙연하게 대담해지긴 했지만

 

자기 위주로 생각하여 묻습니다.

 

이 고통을 피해야 하는가? 이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언제 도망쳐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의 영혼에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받은 느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정한 친구는 어떤 시련에서 도망쳐야 할지

 

어떻게 피해야 할지를 잘 압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이웃을 성화(聖化)시키기는커녕 이웃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주의 독서에서 여러 번 읽었으므로

 

유다인들이 못살게 굴 때마다 피하여 몸을 숨기시는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의 예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곁에 서서 주님을 보면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아까워서 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께 치욕을 안겨주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주님의 곁에 서서 주님을 보면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들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무시하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들도

 

주님께 치욕을 안겨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양면의 칼과 같아서 이들의 영혼과 마음을 잘라 버립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보고도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해 무척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울면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백 가지의 다른 제복(祭服)을 갈아 입는다 한들

 

의로운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소.”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덕()이 만발해야만 할

 

여러 나라의 거룩한 교회들이

 

이렇게 나쁜 사람들로 인하여 황폐화된 것은 너무나 슬픕니다.

 

그러나 이런 비참함을 알고 몹시 마음 아파하는

 

수많은 하느님의 친구들이 고해사제가 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네 번째는 주님을 만나 너무나 기뻐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지고(至高)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혼을 사로 잡으시어 자기를 버리고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당신만을 생각하게 만드셨을 때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알고

 

성인들이나 천사들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하느님을 모시게 된 영광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자기와 세상 것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마침내 “나는 다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리라.”하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린 영혼이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만 생각하고 있으면,

 

하느님께서는 이 영혼을 사랑하시고 칭찬하시고

 

당신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해주시는데,

 

이는 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가 이런 행복을 얻게 해주소서. 아멘.

 

(주님 성지수난주일 첫 번째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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