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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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답이다 -기도와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원장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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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7-06-07 ㅣ No.112455



2017.6.7. 연중 제9주간 수요일, 토빗3,1-11ㄱ.16-17ㄱ 마르12,18-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원장신부님



기도가 답이다

-기도와 삶-



메마른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하느님의 은총처럼 오랜 가뭄 끝에 

지난 밤부터 지금까지 내리는 단비가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십니다. 

기도의 은총도 이와 같습니다. 

날마다 우리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는 이 거룩한 매일미사 은총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가 모두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살기위하여’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서의 모든 사람들이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흔히 수도자를 기도의 사람이요 기도에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신자는 물론이고 사람은 모름지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기도하라고 두발로 서있는 직립인간이요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화답송 후렴처럼, 하늘이신 주님께 우리 영혼을 들어 올리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요 하느님 공부에 기도와 말씀 공부는 필수입니다. 


기도도 평생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 끊임없이 기도의 훈련도 해야 합니다. 


요즘 왼쪽 무릎의 불편으로 1년 이상 물리치료를 받았고 앞으로도 평생 스스로 근육 유지를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합니다. 

물리 치료사의 권고입니다.


“평소 제가 드린 숙제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근육을 튼튼히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근육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고공농성중인 분에게 근육이 풀어지지 않도록 운동하라는 어느 경험자의 충고도 생각납니다. 

즉각 연상된 것이 ‘육신의 근육’이 아닌 ‘영혼의 근육’이었습니다. 


영혼의 근육이 풀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근육이 좋아야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좋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건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근력운동’이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튼튼한 영혼에 내적 힘의 증진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항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대가들의 한결같은 충고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영혼의 호흡이 바로 기도입니다. 


영혼이 살기위해 끊임없이 기도할 때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삽니다.


오늘 토빗기의 독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토빗의 기도와 사라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를 보면 삶이 드러나고 삶을 보면 기도가 드러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입니다.


토빗의 기도를 통해, 사라의 기도를 통해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둘다 목숨을 걸고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토빗은 먼저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를 고백하고 죄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죽음을 청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을 고백합니다. 

어제 화답송 후렴,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란 말씀이 그대로 토빗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고통중에 바치는 사라의 기도도 감동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었지만 사라 역시 하느님께 찬미로 시작하여 목숨을 거둬달라고 기도합니다.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역시 하느님 찬미로 시작되는 하느님 중심의 사라의 기도입니다. 

기도중에 제일이 하느님 찬미입니다. 

수도자는 물론 믿는 이는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하느님을 닮은 진선미眞善美의 영혼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여 우리 수도자들은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칩니다. 


기도는 우리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 방식으로 어떤 형태로든 적절한 때 하느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토빗과 사라가 간절한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한 바로 그 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고, 

마침내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주도록 파견됩니다. 


사라의 남편들을 죽인 ‘멸망시키다’라는 뜻의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와 반대되는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뜻의 하느님의 천사 라파엘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복음의 사두가이 사람들이 제대로 기도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다면 결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신앙 역시 기도의 열매이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의 부질없는 질문에 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시며 부활의 신비를 친절히 소상히 밝혀 주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12,24-25).


예수님 역시 아버지와 하나된 기도덕분에 이런 진리를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사두가이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을 근거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12,26-27참조).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은 토빗과 사라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또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습니다.’(루카20.38).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드리는 우리의 생미사와 연미사입니다. 


바로 천상영혼들과 연옥영혼들, 그리고 지상영혼들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요한11,25.26참조),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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