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2017년 6월 25일) 미사

스크랩 인쇄

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12812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미사) 2017625.      

 

에페 4, 29-5,2; 마태 18, 19-22.                  

 

오늘 복음은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과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두 구절을 분리해서 알아들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두 사람이 야합(野合)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하느님에게 청하되, 그 합심의 동기가 예수님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고, 야훼라는 이름을 알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부르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의 이름은 그 인물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합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도 사람의 이름은 존엄한 것으로 생각되고, 사람이 소중한 그만큼 우리는 그 이름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활동과 운명을 자기들 생활의 지표(指標)로 삼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들을 보면,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이 단편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복음은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 18장의 한 부분입니다. 마태오복음서 18장부터 20장까지는 교회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한 사람들의 모임이고, 교회가 하는 기도는 하느님이 들어주시는데, 그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자비와 어떤 용서이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 곧 율사와 사제들은 사람들을 쉽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고, 성전에 제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도 죄인입니다. 병들거나 불행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죄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죄의 대가로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유대교는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판단하고, 벌을 주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점에 있어서는 전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심판 받고, 사형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믿던 하느님에게 당신을 맡기고 죽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그 시대 로마제국 안에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자비와 용서로 채색된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데 용감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4세기 말에 이르자 그리스도신앙은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도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4세기 말부터 소위 야만족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이 유럽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 그 혼란의 와중에 로마제국의 문화와 동일시된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는 그 시대 지배층으로 남았습니다.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출현과 그것의 정착에 절대적 기여를 한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면서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비와 용서를 서서히 잃어 갑니다. 사회의 질서(秩序)와 기강(紀綱)을 위해서는 단죄(斷罪)와 벌()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봉사가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인간이 구상하는 효율성 뒤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과연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신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우리는 그분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비와 용서를 위한 힘든 노력이 우리 안에 조금은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분들 가운데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벌주는 분으로 가르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들이 함께 청하고 싶은 숙원(宿願)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청()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할 것은 당연히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말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시오.” 예수님의 답입니다. 무한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용서에도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흉내 내기 어려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두 번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그렇게 다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도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를 키울 때 자녀가 몇 번을 잘못해도 용서하고 새롭게 위해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연약한 생명들이 자라고 사랑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그런 사랑이 있기에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랑을 배우며 자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면, 그런 용서와 그런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6.25를 기념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분단 후 70년이 넘었지만, 남북의 대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폭군의 통치 아래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허수아비와 같이 살고 있는 북녘의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오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서 공석 신분님의 강론

 

요즘 트위터 페이스북 더보기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357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