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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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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12823

 

2017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제1독서 이사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

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사도 13,22-26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복음 루카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행복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불행’일까요? 누군가는 행복의

반대말이 ‘권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죽은 삶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행복의 정반대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주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행복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을까요?
이분에게 직접 그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삶이 재미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이 ‘권태’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이 권태가 찾아와서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삶이 재미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될 때,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삶은 내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들

 안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지속성이 없기

때문에 금세 실망하게 되고 때로는

절망으로 나를 이끌게 됩니다.

따라서 무한하고 영적인 것들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분명히 어떤 힘듦과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의 씨앗을 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보냅니다.

세례자 요한 주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주로 광야에서

생활하셨지요. 호화롭고 안정된

삶이 아닌, 척박한 땅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나를 광야로

내몰고 낙타털로 만든 옷 한 벌을

주고는 알아서 지내라고 하면 어떨까요?

마치 감옥에 갇힌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았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힘듦과

어려움이 가득한 곳으로 보이지만,

이 안에서 주님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게 준비하는

행복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발견은

세상의 발견보다 중요하다.

(찰스 핸디)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신 곳.

"긍정을 부르는 말"

(최종희, ‘열공 우리말’ 중에서)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나왔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들이 발간하는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당시 그가 해낸 일 중 동료들이

가장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모든

부정어를 긍정어로

바꿔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자유를 향한

꿈이 있는 나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신이 직접 연설문을

 수없이 수정했고,

퇴임 후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명문을

가장 많이 남긴

대통령으로 인정받았다.
우리말에서도 부정과 긍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대게 ‘없다’와

‘있다’를 쓴다. 그런데 ‘있다’가

 붙은 말은 터무니없이 적다.

흔히 쓰는 것은 ‘재미있다. 맛있다.

 멋있다, 상관있다’ 정도로, 드물게

쓰이는 것까지 합해도

20여 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없다’가 들어간 말은

‘힘없다, 볼품없다’ 등 어림잡아

140여 개나 된다. 우리가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 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긍정적으로 살기,

그 출발은 어쩌면

쉬울지도 모른다.

‘있다’가 들어간 말은

되도록 많이 사용해 보자.

 우선 ‘멋있다, 맛있다, 뜻있다,

재미있다’ 네 가지 말만이라도

자주 쓰는 것이다. 그리고 ‘없다’는

 ‘있다’로 바꾸어 보자.

이를테면 ‘반칙 없는 사회’를

 ‘원칙 있는 사회’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라도 ‘있이’ 살면 좋겠다.

없이 사는 것보다 백 배 낫고,

말은 돈도 들지 않는다.
긍정을 부르는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지금의

상황 때문이라는 불평불만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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