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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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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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7-13 ㅣ No.113192

 

2017년 7월 13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제1독서 창세

44,18-21.23ㄴ-29; 45,1-5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복음 마태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흰 여백만 있는 백지 같은
상태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 놓이면 어떠십니까?
행복과 기쁨이 떠올려질까요?
아니면 불행이나 절망이
떠올려질까요?
문득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생각납니다.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면서
 찾아다녔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낙서할 빈 벽이었지요.
이 빈 벽을 열심히 찾아다녔고,
‘낙서금지’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옆 빈 공간에 또 다른
낙서를 즐겁게 했습니다.
이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분명히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머릿속이 백지 같다고
 한다면 오히려 기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적을 수 있으며,
새로운 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실패의 두려움,
나는 부족하다는
낮은 자존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과
낮은 자존감이 생길 때,
 ‘실패는 없다’는 확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의 낙서가 아무런
의미도 없고 혼날 수도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했던 것은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즉, 실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즐기면 됩니다. 
저를 향해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습니까?”
라고 묻더군요.
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계속 쓰면 됩니다.”
계속된 글쓰기가 자신도
모르게 글의 질을
향상시키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글쓰기도
즐거워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계속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즐겁지 않은 사람은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즐길 때,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이런 마음으로 제자들도
전교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즐겁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자리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상태에서
파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지니지 말게 하셨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운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함에 대한
불평불만보다는,
또한 제대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걱정보다는
주님의 일을 함께 한다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인 것이지요.
즉, 지금을 즐겼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
등의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지금을 기쁘게 그리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분명히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술이다.
(조너선 스위프트)
전교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은 참 많은 것을 얻게 합니다.
"강아지를 그린 까닭"
(‘좋은생각’ 중에서)
러시아 삽화가
 ‘블라디미르 파보르스키’는
편집자가 자신의 작품을 고
칠 때마다 속상했다.
‘어떻게 하면 작품을
보존할 수 있을까?’
그는 고민 끝에 삽화
한쪽에 강아지를 그려 넣었다.
지워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림을 본 편집자는
깜짝 놀라 말했다.
“이 강아지는 꼭 지워야겠습니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소리요?
내겐 소중한 작품입니다.”
의견을 주고받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그는
슬쩍 한발 물러났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미안해진 편집자는
 ‘이번엔 내 뜻을 따랐으니
다른 건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상대 의견도 받아들여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파보르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지킬 수 있었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면
상대의 의견을 먼저 인정해 줘야
 한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견을 먼저
인정해주는 것 역시 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대의 의견을
인정하기보다는 나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설득시킬 수 있을 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강화의 용흥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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