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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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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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8-16 ㅣ No.113937

 

2017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제1독서 신명 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복음 마태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겸손함이야말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눈에 장막을 쳐버리는
거만함을 내쫓는 것이
 바로 겸손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한지를
알아내는 방법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저는 사제가 된 후에 외국을
참으로 많이 다녔습니다.
성지순례, 개인 여행,
또는 강의를 위한 목적으로
국을 많이 다녔습니다.
 처음 외국을 나갈 때에는
걱정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은
한국말만 익숙한
저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국 나가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손짓발짓
모두 동원해서야 저의 필요를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불편한 조건이지만
그리 힘들지 않은 이유는
오히려 좋은 장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저절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저에게 불리한 일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온전히 집중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
제가 평소에 지향하고 있었던
 겸손의 모습인데 이를 외국에
나가면 저절로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며칠을 생활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감사해지고, 외국에서 보였던
 경청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도
쉽게 펼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말을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설득시키라고 하지요.
이렇게 해서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기준이기 때문에
여기에 겸손함이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설득하기도 힘듭니다.
교회가 나서서 말을 해도 무시합니다.
그만큼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형제를 위해서
몇 단계에 걸친 계속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식으로,
그래서 곧바로 당시의 유다인들이
 이방인이나 세리들에게 했던
것처럼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고
무시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진정으로 이웃을
잘 관찰하고 경청할 수 있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형제가 죄를
지었다 해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역시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생활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평범함이 진리로 다가오는 까닭은
겸손해졌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활에 대한 기억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노 아야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습니까?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원한다."
(‘좋은 글’ 중에서)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날마다 반성하는 삶"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자신의 시간들을
후회 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듭니다.
둘째는
 "용기 있는 삶 "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지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이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
자신들의 삶이 아무것도
남기지?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없어지지 않을 것들,
참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대답에서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훌쩍 떠나고 싶네요.
그러나 갑곶을 지켜야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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