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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6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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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9-26 ㅣ No.114985




2017
09 26 () 가해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Tuesday of the Twenty-fifth Week in Ordinary Time
(
성 고스마와 성 다미아노 순교자 기념일)

에즈라기 6,7-8.12.14-20 / 잠언 21,1-6.10-13
루카복음 8,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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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에즈라기 6,7-8.12.14-20

그 무렵 다리우스 임금은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7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유다인들의 지방관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8 이제 그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도록 그대들이 유다인들의 원로들을 도와서 해야 할 일에 관하여, 내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왕실 재산 곧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받는 조공에서, 지체하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비용을 내어 주어라.

12 나 다리우스가 명령을 내리니 어김없이 시행하여라.

14 유다의 원로들은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힘입어 건축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15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16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17 이 하느님의 집 봉헌식에는 황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18 그런 다음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을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을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19 돌아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20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제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돌아온 모든 유배자와 동료 사제들과 자기들이 먹을 파스카 제물을 잡았다.



Reading 1


Ezr 6:7-8, 12b, 14-20

King Darius issued an order to the officials of West-of-Euphrates:

"Let the governor and the elders of the Jews continue the work on that house of God; they are to rebuild it on its former site. I also issue this decree concerning your dealing with these elders of the Jews in the rebuilding of that house of God: From the royal revenue, the taxes of West-of-Euphrates, let these men be repaid for their expenses, in full and without delay. I, Darius, have issued this decree; let it be carefully executed."

The elders of the Jews continued to make progress in the building, supported by the message of the prophets, Haggai and Zechariah, son of Iddo.
They finished the building according to the command of the God of Israel and the decrees of Cyrus and Darius and of Artaxerxes, king of Persia.
They completed this house on the third day of the month Adar, in the sixth year of the reign of King Darius.
The children of Israel ? priests, Levites, and the other returned exiles ? celebrated the dedication of this house of God with joy.
For the dedication of this house of God, they offered one hundred bulls, two hundred rams, and four hundred lambs,
together with twelve he-goats as a sin-offering for all Israel, in keeping with the number of the tribes of Israel.
Finally, they set up the priests in their classes and the Levites in their divisions for the service of God in Jerusalem, as is prescribed in the book of Moses.

The exiles kept the Passover on the fourteenth day of the first month.
The Levites, every one of whom had purified himself for the occasion, sacrificed the Passover for the rest of the exiles, for their brethren the priests, and for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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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잠언 21,1-6.10-13

1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2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3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4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5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6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Reading 1


PRV 21:1-6, 10-13

Like a stream is the kings heart in the hand of the LORD; wherever it pleases him, he directs it.


All the ways of a man may be right in his own eyes, but it is the LORD who proves hearts.


To do what is right and just is more acceptable to the LORD than sacrifice.

Haughty eyes and a proud heart ? the tillage of the wicked is sin.

The plans of the diligent are sure of profit, but all rash haste leads certainly to poverty.


Whoever makes a fortune by a lying tongue is chasing a bubble over deadly snares.

The soul of the wicked man desires evil; his neighbor finds no pity in his eyes.

When the arrogant man is punished, the simple are the wiser; when the wise man is instructed, he gains knowledge.

The just man appraises the house of the wicked: there is one who brings down the wicked to ruin.

He who shuts his ear to the cry of the poor will himself also call and not be he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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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Gospel


Lk 8:19-21

The mother of Jesus and his brothers came to him but were unable to join him because of the crowd.

He was told, "Your mother and your brothers are standing outside and they wish to see you."
He said to them in reply, "My mother and my brothers are those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act o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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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9 26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된 계약의 궤는 다윗 왕조를 지켜 주는 표징이었지만, 이스라엘이 하느님 말씀보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아 바빌론 유배의 아픔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되찾아 주고 성전을 재건하는 기쁨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약과 말씀을 되찾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속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선언하시어 선택과 혈연이 아닌 믿음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단순히 혈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신앙의 모범이심을 암묵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태중에 모시고,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고 곰곰이 숙고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나는 얼마나 성경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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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9 20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악인의 마음속에는 사악한 마음이 가득하여 이웃을 돌보려는 사랑의 마음은 없습니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그 행위 안에 약자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허영과 위선으로 바치는 제물보다 의로움의 실천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신비는 사랑입니다. 그 모든 행위와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짧은 단락은 예수님 말씀의 의도를 알아듣기 어렵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이럴 때 보통 우리라면 뛰어나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려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 구성원이 되고 천상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혼이 깨끗해져 진실한 형제애를 실천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1,22 참조). 성모 마리아를 영적인 어머니로, 사도들을 영적인 형제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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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9 2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가족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의아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을 멀리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형제로 삼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본당 사제의 가족이 본당 구역 안에 살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사제가 가족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당 사목에 지장을 줄 정도로 신자들보다 가족에게 관심을 더 기울인다면 신자들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 장애가 되겠지요.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신자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족이 아닌 일반 신자라 하더라도 특정한 사람들하고만 특별히 만나거나 환대하다 보면 다른 신자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작은 가족 대신 한없이 큰 가족을 품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구원하신 이들을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 2,11) 그들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께 제자를 맡겨 드리면서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외아들을 잃는 그 자리에서 모든 제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려고 부모와 자녀를 버리는 이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마르 10,30)를 백 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영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가족을 떠나는 것은 더 큰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사랑을 위해서, 더 많은 이를 형제로 맞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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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9 23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비교적 근래에 성인 반열에 오른 분 가운데 참으로 열렬히 공경을 받고 또한 그의 시성식이 큰 화제가 된 성인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이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출신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사제입니다. 성인의 인기가 고국인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높은지는 도시의 식당이나 카페들에서조차 쉽게 눈에 띄는 그의 사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지닌 성덕의 위대함은, 세속화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심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을 철저하게 증언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 몰려들고 인간적으로 추앙 받던 상황에서도 그는 참으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환심을 사기보다 때로는 거친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회개하고 참된 신앙을 다시 찾도록 인도했습니다. 또한 성체성사가 예수님과 나누는 참된 친교이며 신비적 실재임을 자신이 혼신을 다해 봉헌하는 미사를 통하여 느끼게 했습니다.
그가 직접 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게 하였듯이, 비오 성인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염려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에 자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사람들이 그를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라고 부르듯이, 그의 다섯 군데의 상처는 예수님의 고통과 일치하며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라는 점을 상징합니다. 그 유명한오상과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어진 환시들과 수많은 치유의 기적 때문에 그의 존재는 현대에 시성된 어느 성인들보다도 우리가기적이라는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기적은 현대 신학이 애써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오 성인에게 일어난 기적들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신비로운초월적 실재와 마주하며 살아간다는 표징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초월에 대한 의식과 경외심 없이는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과 희망을 두는 순례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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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9 24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3대 제주교구장을 거쳐 지금은 원로 사목자로 지내는 김창렬 주교님은 예수님을형님이라고 자주 부릅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다듬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철이 나고 배울 걸 거의 다 배우고 섭렵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라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냥 발가벗은 어린애처럼 거리낌 없이 예수님하고 함께 지내려고 해요. 그분께서는 마음이 아주 넓으시고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시는 형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드네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 제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데리고 가시어아버님, 이놈이 제 동생인데 아버님 아들로 좀 삼아 주십시오.’ 하실 것 같아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가그래, 너 이놈아! 내가 아빠다. 그래, 아빠야. 넌 내 아들이라니까.’ 하시며 반기실 것 같고요.
성부 하느님과 저는 부자지간, 또 성자 예수님과 저는 형제지간, 이렇게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림자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가족이 되지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교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를 둘러싼 군중을 보시며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형님이시고 오라버니이십니다. 동생이 불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장 그 안에 뛰어드시어 꺼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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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9 25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님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가 끝나고 사흘이 되어서야 당신을 찾으신 부모님께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며 부모님을 섭섭하게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혈육의 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에 정열을 쏟으시느라 정신이 없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자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은 걱정이 되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어머니를 친척들에게 맡기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셔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도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어야 할 마음을 지니시고, 사람이면 누구나 해야 할 행동을 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늘 어머니를 염려하신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집을 떠나시어 세상 속으로 나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믿으셨기에 아드님이 가시는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가족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가족 사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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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92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흘 만에 부모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말씀하셨지요. 오랜 시간 애가 탔을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차 하느님 일을 할 때 부모라는 혈육의 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고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아들 예수님에게 닥칠 수난과 죽음을 육친의 정으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자의 육정에만 매달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가 육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큰 뜻을 이루는 관계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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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9 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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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9 22)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말하기 싫어합니다. ‘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는 답변을 피하려 듭니다. 질문 자체를 피곤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답할 수 있어야 삶이 분명해집니다.
답변 가운데 하나는 분명 가족입니다. 자녀와 배우자와 부모 형제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들이 ‘삶의 중요한 이유’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연만큼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과의 관계를 ‘기쁨으로 만드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엉망이라면 ‘주님의 개입’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가족 간의 일치는 주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이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좋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릅니다. 예기치 않은 변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핏 들으면 어머니를 외면하는 말씀인 듯합니다. 하지만 가족을 도외시하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를 어머니와 형제로서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이 건네는 십자가는 언제라도 무겁고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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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9 23)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들으면 냉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분께서 어머니를 무시하시는 말씀을 남기신 것은 아닙니다. 혈연관계 못지않게 영적 관계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예수님과의 영적 관계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누구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예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의 취지는 혈연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으로 요약되는 가르침입니다. 차가운 율법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입니다. 자신에게는 계명의 거울을 들이대고, 타인에게는 따뜻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노력입니다. 그렇습니다. ‘베풀려는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어머니며 모두가 형제입니다. 부모와 가족으로 모셔야 할 분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심장은 암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베풀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따뜻한 피를 공급하기에 암세포가 붙을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풀면 악한 기운이 붙지 못하는 것이지요. 베푸는 삶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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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9 25)


“왜 사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시큰둥합니다. 그만큼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의 답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삶에 대한 답을 지녀야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답변 중의 하나는 가족입니다. 자녀와 배우자 때문에 살아간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의 인연은 소중합니다. 가족들 사이의 관계를 기쁘게 완성하는 일은 삶의 중요한 몫입니다. 가족들 사이에 사랑으로 열매 맺는 일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쉽지만도 않습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한계를 느낍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오히려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외면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도외시하는 예수님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를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로서 맞이하시겠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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