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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나 17 【 참 행복 2】 “슬퍼하는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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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cham3385] 쪽지 캡슐

2017-11-20 ㅣ No.116312

#참행복 17

【 참 행복 2】 “슬퍼하는 사람" 1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 4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어둠의 골짜기로....

‘어둠의 골짜기’ ‘새롭고 밝은 빛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밖에 없는 좁은 통로’입니다. 이곳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없는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기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땅 속! 연어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수천의 삶을 살고자 자기가 내려 온 원천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계곡!

사람이 땅의 것을 욕심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죽게 되어 짐승의 옷을 입고 짐승처럼 되었기에 온 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짐승)의 흔적’ 없애고 ‘참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잘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이란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시고 친히 걸어가신 “사랑의 길”입니다. 이 길은 결코 고통의 길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가다 보면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이 듬뿍 배어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라고 희망에 찬 말씀을 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 : “슬퍼하는 사람”은 빛 자체이신 하느님과 비겨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맞지 않는 자기 자신의 죄(교만과 불순명)를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맞지 않는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모든 것 다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속죄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가 14, 26~27

그분은 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오 16, 24~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알아듣고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저 생명의 샘, 아니면 영혼의 중심(가장 안)에 계시는 저 빛나는 해님‘(예수의 데레사 성녀,「영혼의 성』)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 안의 하늘스런 궁성’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궁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성 밖의 모든 사정으로부터 떠나야만 합니다. 모든 사물이나 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한 욕심과 집착까지도 없애야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욕심과 집착을 온전히 버리지 않는다면 다시 궁성 밖으로 되돌아 나올 수 있기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이유를 다시 말하자면 우리 영혼의 중심에 계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이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속해 있던 없어져버릴 육적이고 물질적인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 혈육의 어머니 뱃속에 생길 때에 만들어진 ‘나의 마음’, 즉 ‘하느님을 닮은 영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나의 영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입김’이기에 내 안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내 안에 계시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밖’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길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나의 오감으로부터 벗어나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알 수 없는 자신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긴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는 욕심 때문에 땅에 온 몸을 대고 있는 뱀의 유혹에 빠져 두 손과 온 몸을 땅에 대므로 아버지로부터 떠나 짐승처럼 죽게 되어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여 너무나도 오랫동안 두 손을 땅에 대고 있으므로 해서 굳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겪는 고통은 바로 ‘자신 스스로’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참 사람”이 되기 위하여서는 땅에서 손을 떼고 땅을 향해 굽혀진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자기 스스로' 하고자 해야 하며 거기서 오는 고통 또한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자신 밖(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안에서 만나는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십자가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떠나 온 후에 빛이신 그분과 맞지 않는 교만과 불순명으로 인해 만들어진 죄악들을 스스로 자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 그것으로 인해 그분께로 다가갈 수 없음을 슬퍼하여 그것들을 없애고자 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짐승처럼 된 자신의 더러움’ 이 세상 그 누구도 없애줄 수 없으며,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깨끗하게 씻어 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더러움’은 오로지 나를 창조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의 피’로써만 깨끗하여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님 만이 그 길을 안내하실 수 있는 안내자이시기에 그분께서 친히 사랑으로 마련하신 “십자가의 길” 외에 ‘나의 더러움’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법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하느님께로 가고 오르는 길은 으레 욕을 끊고 그치게 하는 조심성이라야 하고, 또 이를 빨리 서두를수록 그만치 이르게 도달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제아무리 덕을 많이 닦는다 할지라도, 욕이 살아 있는 한 도달이란 있을 수 없다. 완덕을 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니, 완덕이란 영혼이 모든 욕을 끊고 벗고 비우는 데 있는 것이다.”(『가르멜 산길』 제1권 5장 6항)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아주 작은 의지적 욕(부러 마음으로 일으키는 욕)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완덕에 나아가기는 그르다고 했습니다.

“여기 한 마리의 새가 묶여 있다고 하자. 가늘거나 굵거나 간에 묶은 줄이 끊어지지 않아 새가 날지 못한다면, 줄이 가늘다 해도 굵은 줄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가르멜 산길』제1권 제11장 4항. 79쪽. 1993)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살아 계셨던 2000년 전에도 그 말씀을 알아듣고 그분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불과 몇 명되지 않았습니다. 또 2000년 동안 살다 간 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그 길을 따라 간 사람들이 불과 몇 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남의 일인 양 생각하며 쉽게 생각되어지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여 거기에 온 힘을 다 쏟으며 삽니다.

그러나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음 앞에 서게 됩니다.
자기가 기대하지 않았던
그 순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렇게 죽음은 자신에게 다가옵니다.
그 때!
두려움 없이
떳떳하고 기쁘게
두 팔을 벌리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오르는 하나밖에 없는 길인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 나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인데, 이 세상 사람으로[살아 있는 동안] 걸어갈 수도 있고 저 세상 사람으로[죽어서-연옥에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을 나 스스로 하도록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내게 당신의 것을 다 주시기 위해 요구하시는 것은 욕심을 버리라는 아주 단순한 것인데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모든 것 다 당신께서 만드셨으니 다 당신의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당신께서 만드시었고, 당신께서 주인이시지만 그 모든 것을 내게 다 주시기 위해서 마련하셨는데 왜 그것을 거부하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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