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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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나 21 【 참 행복 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2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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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cham3385] 쪽지 캡슐

2017-11-24 ㅣ No.116396

[하늘땅나 21] 참 행복 2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21

2처 십자가를 지다.

십자가 : 무겁고 거칠다.
죄가 아주 큰(극악무도한) 사람을 처형할 때 쓰는 형구.

예수 그리스도님 :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 앞에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구세주 그리스도님의 신분을 버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람들에게 끌리어 골고타를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요한 19, 17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사야 52, 13-15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이사야 53, 1-12


“십자가”란 죄악, 더러움, 슬픔, 절망, 고통, 패배, 교만과 하느님께 대한 불순명, 어두움 등. “죽음의 대명사”입니다. 생명과 반대되는 그 모든 것들은 마귀에게 속한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거기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못 박히시므로 완전히 바뀌어 희망, 기쁨, 구원, 생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이제 마귀와 세상과 싸워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의 공격을 막는 병기가 있다. 십자가에는 천상의 아름다운 맛이 흐르고, 십자가에는 마음의 용기가 있고, 십자가에는 영신의 즐거움이 있으며, 십자가에는 덕의 극치가 있고, 십자가에는 성화의 원만함이 있다.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도 구하지 못하고 영생도 얻을 희망이 없다. 그러니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라. 그러면 영생의 길을 갈 것이다.” (“성 십자가의 왕도” 준주성범 제2권 제12장 2항)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 세상 끝날 까지 저질러지는 모든 죄악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 무게가 어떠했을 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지워주시는 십자가는 다만 내가 만든 나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기에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신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에 내가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무게의 십자가를 내게 지워주시며 아울러 그것을 지고 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믿는다는 것’‘보이지 않는, 모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짐승의 형태를 가지고 살고 있던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며 내 눈으로 그곳의 빛과 형태를 볼 수 있지만, 지금부터 가고자 하는 세상은 내 눈으로는 감지할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가고자 하는 그 끝에 깨끗함 자체이시며 빛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너무나도 찬란한 빛으로 존재하시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만 길들어진 ‘짐승처럼 된 내 눈’으로는 도저히 그 밝은 빛을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밝은 빛을 향하여 끝임 없이 나아가노라면 어느새 내 몸은 깨끗하여지고, 내 눈에 씌어있었던 더러운 짐승의 비늘이 벗겨지게 되어 마침내는 그 찬란한 빛 속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서는 ‘믿는 것’이 아니라 보고 ‘아는 것’입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땅 위를 거닐며 그분을 뵈옵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그렇게 그분을 뵈옵고 그분에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이제부터 ‘내가 걸어갈 길’은 바로 ‘죽음의 길’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땅에 속한 짐승스런 모든 것들을 죽여 없애는 작업을 하는 길이며, 또한 이 길은 '영원한 삶에로 이어지는 생명의 길’입니다! 나의 죄악으로 인해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 무상으로 주어진 나의 귀한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길은 비록 무섭고 견디기 어렵다 할지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최상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샘물이 펑펑 솟아나는 높은 산 계곡에서 살아야 하는 물고기가 죽게 되어 아무런 힘도 없이 점점 더 더러워지는 흐르는 물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 오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어(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죽어있었기에 계속 떠내려가던 흘러가는 더러운 물’에서 방향을 바꾸어 자기가 떠내려 온 근원지로 가기 위해 ‘흘러 내려왔던 물’을 거슬러 되돌아가는 일을 시작하여 마침내 위로 오를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죽은 물고기 내려갈 곳이 더 남아있으면 계속하여 떠내려가든가 물이 고여 있으면 물이 움직이는 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 더러운 물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물고기 자신이 속해 있던 물이 더럽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 물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을 더 이상 받아줄 수가 없어 과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깨끗한 물을 찾아가기 위해 위로 올라가기로 작정하고, 근원지로 나아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곳을 찾은 그의 앞에는 위로 오르는 험한 계곡이 펼쳐집니다.

위로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오르는 길에는 부모도 친구도 아무도 함께 할 수 없고 오로지 혼자서 외로이 힘겹게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 도달한 때부터 벌써 자신의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전보다는 깨끗한 물의 감촉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 온 물은 벌써 그를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 물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깨끗해져 그 물을 먹고사는 물고기를 점점 더 깨끗하게 해주며, 마침내 죽음의 관문인 12처를 통과하면 맑디맑은 물이 있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달하게 되어 물고기는 태어날 때의 깨끗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

'밀알이 땅 속에 들어가는 것' 비유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가장 적합한 자리에다가 밀알을 뿌립니다.

그 장소와 시기는 전적으로 농부가 결정하고 시행합니다.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밀알이 떨어진 그 장소, 곧 그 공간(땅)은

밀알이 썩어 밀알의 형체를 온전히 없앨 때(죽음)까지 있어야 할 곳,

즉 십자가입니다. ‘밀알이 땅 속에 들어 있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밀알"은 이제 온전히 썩는 그 날까지 그 주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온갖 것들과 함께 그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밀알은 그곳을 떠나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밀알의 주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거름, 돌멩이와 흙, 축축한 물기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밀알이 예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이 싫어하고 피하기만 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을 썩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로 바꿔줄 아주 귀한 것들이기에 고마워하며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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