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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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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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숙 [mi4006] 쪽지 캡슐

2017-12-16 ㅣ No.116871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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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를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그것이 희망이든 욕망이든 무엇인가를 원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모든 바람이 모두 소진이 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황에 놓여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어떤 바람 자체를 가질 수 없는 상황, 모든 희망과 욕망이 성취여부 상관없이 허무하게 끝나고,

다시는 그 어떤 것도 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당신이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임종의 순간을 체험해왔다.
묘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이 다가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신부인 나의 말이나 기도에 철저하게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즉, 우리의 모든 인간적 욕망이 끝을 맺어야만 할 때, 본능적으로 절대적 존재를 찾으려 한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세계가 주는 두려움은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든다.

그 순수함을 끝이 보일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인간적 바람이 살아 있는 지금 찾아야만 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지극히 간단한 명제일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숙제일 수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마태오16,26)는 그분의 말씀.
너무도 지당하고 쉬운 말씀이거늘 우리는 눈앞의 욕망에 주체를 못한다.
어느 인간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숙할 수 없다.
여기서 성숙이란 잡을 것과 놓을 것을 식별하는 지혜이다.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들, 아니 믿고 싶어 믿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들.
분명한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담보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시간이고 생명이다.

가끔 욕망의 끝자락에 서있는 자신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그 끝에 놓였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렇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오랜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다.
제대로 그것을 알고 그에 맞게 삶을 만드느냐, 아니면 제멋대로 다루느냐가,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마지막 모습을 결정하게 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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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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