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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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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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12-17 ㅣ No.116887

 


2017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

제1독서 이사 61,1-2ㄱ.10-1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제2독서 1테살 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복음 요한 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

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전에 성지순례로

 요르단에 가서 겪었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서 요르단에

입국했는데 글쎄 제가

가지고 갔던 여행 가방의

지퍼(zipper)가 고장 나서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마침 호텔 맞은편에

여러 물건들을 파는

상가가 보입니다.
이 상가는 화려한

백화점이 아니라,

우리나라 7~80년대의

분위기를 내는 잡화상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몇 군데를 둘러보면서

 가진 생각은 가격을 무조건

깎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호객 행위도 대단했고,

또 이런 곳에 위치한 상점들은

손님들이 깎을 것을 대비해서

먼저 비싸게 가격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55달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하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저렴하면서도 동시에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구입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해서

 짧은 영어 실력으로

 “Discount Please~~”

(깎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흔쾌히

“Okey!!”(좋아요)라고

 말하면서 25달러만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 말하지 않고 25달러를

주고 구입한 가방을 들고서

기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제 생각에 싸다는

생각에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구입했다면

어떠했을까 싶더군요.

 딱 두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자그마치 30달러를

깎을 수 있었습니다.

순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내 자신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는 말도 있으며,

내게 이익이 아닌 오히려

큰 손해를 가져다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자신만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사랑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내 마음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함께 기쁨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대림초의 불을 세 개 밝힌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당시 그는 사람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등의 호칭을

받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지요.

이 정도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맞다.”라고만 말해도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 1,20)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동시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7)라는

큰 겸손의 말을 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짐짓

뛰어다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제1독서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맞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닌, 주님을 위한 말을

세상에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요?

세례자 요한처럼 큰 기쁨

안에서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를 알리는 말을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1테살 5,16)

자신의 허물을

지적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허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파스칼)

2009년도 동창신부들과의 성지순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고백"

폴란드 심리학자 카지미에시

동브로프스키는 195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생존자가

전쟁에서 겪은 충격적 경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폴란드는 끔찍한 참상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동브로프스키는

이 생존자들을 연구하다가

놀라운 점을 발견합니다.

생존자 대다수가

전쟁 기간 동안 괴롭고

충격적인 경험을 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현재

더 책임감 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겪지

않지 않았으면 소중한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게을렀을 것이고,

작은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중요한 것을

놓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전쟁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훨씬 더

정적이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변화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좀 더 행복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분들이 많지요.

새롭게 변하게 될 내 자신을

 꿈 꿔 보시길 바랍니다.

벌써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전쟁은 안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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