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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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관상의 제자弟子, 활동의 사도使徒-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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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8-01-19 ㅣ No.117677



2018.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사무상24,3-21 마르3,13-19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관상의 제자弟子, 활동의 사도使徒-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얼마전 써놨던 ‘신망애의 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아주 한파가 심했던 날 배밭사이 길을 산책할 때 겨울 빈 배나무들을 본 감동에 써놓은 글입니다. 이렇게 날씨가 추울 때는 절로 봄을 기다리는 심정이 됩니다. 입춘은 2월4일, 봄은 옵니다.


-나뭇잎들/다 벗어버린

 빈 겨울나무들


 겨울 한파寒波/강추위를 

 어떻게 저리 견뎌낼 수 있는가


 부활復活의 봄/기다리는

 희망, 믿음, 사랑 때문이다


 세상에

 신망애信望愛를 능가할 수 있는/힘은 없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신망애의 힘입니다. 신망애의 내적 힘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참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이래야 세상 허무에 유혹에 환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삶의 중심이, 삶의 줏대가 없으면 도와 줄래야 도와 줄 수가 없습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입니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비로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의 남편에 대한 비판중 ‘껍데기’란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남편은 완전히 '껍데기의 삶'입니다. 퇴직후 밥먹으면 나가 당구치고 돌아와 밥먹고 TV보고 잠자고---날마다 그렇게 삽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완전히 껍데기 같고 나는 로봇을 조종하는 것 같습니다.”


문득 사람이 ‘생각없이’ ‘목표없이’ ‘희망없이’ 껍데기의 삶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살아가며 나이들어간다는 것이 생각없이 그저 단순한 반복의 40바퀴, 50바퀴, 60바퀴,--- 트랙을 도는 경주와 같다면 아무리 오래 산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삶의 의미는 관계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알맹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살아갈수록 깊어지는 주님과 신망애의 관계가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날마다 새하늘, 새땅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저 육적 욕망 충족의 삶이라면 참 허망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땅속 깊이 뿌리내린 아름드리 나무는 바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삶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얼마나 깊고 확고한지요. 반면 사울은 하느님 중심의 삶은 허약해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다윗이 한결같이 관대하고 담대하고 솔직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나무처럼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을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시 바랍니다.”


자기 목숨을 쫓는 사울을 향한 다윗의 말에서 그가 얼마나 확고한 하느님 중심의 삶인 지 깨닫게 됩니다. 즉시 사울은 다윗의 말에 뉘우쳐 답변하지만 웬지 경망해 보이며 진정성이 약해 보입니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깊은 삶이라면 이렇게 즉흥적으로 가볍게 속내를 들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 이후로도 사울은 계속 다윗의 목숨을 노립니다. 이렇게 삶에서 하느님 중심을 잃어 내적으로 무너져내리면 존엄한 품위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실 궁극의 내적제어장치와도 같은 하느님 중심이 사라지면 그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그 삶은 얼마나 위태한 지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을 중심으로 하여 사도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동반자로 삼으시니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 잘 드러납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님을 중심으로 확고히 제자리를 잡은 모습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핵심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중심에 확고히 뿌리내린 사도들의 삶입니다. 내적으로는 늘 주님과 함께 있는 ‘관상의 제자들’이요 외적으로는 ‘활동의 사도들’임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 바로 하느님을 중심한 우리의 신원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마침 어제 외출중 ‘주닮교회’라는 개신교회 이름이 생각납니다. ‘주님을 닮은 교회’ 라하여 ‘주닮교회’ 라니 참 기발한 이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 주님의 사도로서 당신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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