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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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3주일, 2018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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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8-01-19 ㅣ No.117689

 

연중 제3주일,     2018121.

마르 1, 14-20.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회상(回想)하면서 그분의 삶 안에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현세(現世)이든 내세(來世)이든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활동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일들을 이야기로 남기면서그것을 기쁜 소식’,  곧 복음(福音)이라 불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듯이하느님은 사람들을 벌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은 우리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고 당신의 일을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 얽매여서 우리를 기준으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느님이 축복하신 것이라 믿고, 그것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할 때는 하느님이 벌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기준으로 하느님에 대해 상상합니다.

 

오늘 복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생각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며 살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말은 그분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전능은 인간이 상상하는 전능입니다인간은 능력과 권력을 가지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도불행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조직폭력배의 두목은 그 부하들 앞에 전능합니다. 부하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등용하여,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 구조의 상위(上位)에 있는 사람은 하위(下位)에 있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전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전혀 그 의미가 다릅니다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전능하신 하느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신다는 말은 당신의 선()과 자비(慈悲)를 실천하신다는 뜻입니다인간은 하느님을 외면하고도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였다고하느님은 상처받거나 복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선과 자비를 외면하는 것입니다선하신 하느님을 외면하면, 선과 악의 기준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마음에 드는 일이 선하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악하다고 생각합니다자비하신 하느님을 외면하면,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자(强者) 앞에 약하고 약자(弱子) 앞에 강하면서자기 한 사람의 이득(利得)만 추구하는 볼품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공산주의(共産主義)는 무신론(無神論)을 주장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하느님에 대한 언어를 지워버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선()과 자비(慈悲)도 인간의 삶에서 사라졌습니다그 결과 공산주의는 살벌한 사회와 무자비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하느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남성 호칭만 사용된 것은 남성 위주의 부권(父權)사회였던 그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인간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고,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인간 본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인간 생명의 기원에 선()과 자비(慈悲)가 있었고인간은 그 선과 자비를 받들어 배워 실천해야 하는 생명체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자녀(子女)는 부모(父母)를 이용하여 자기가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습니다자녀는 부모와 함께 있으며 부모의 뜻을 받들어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녀의 기쁨입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인류역사상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실천한 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도 선하고 자비로운 일을 실천합니다예수님이 실천한 병 고침죄의 용서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있습니다병고(病苦)도 있고배신(背信)도 있으며실패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겪어야 하는 실망도 있고아픔도 있습니다인간 생명은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웃고울면서 살아갑니다하느님을 믿는 것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고통과 불행은 사라지고좋은 혜택만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신앙인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인간의 현실을 바로 봅니다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視線)으로 주변을 봅니다그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오시게 하는 일입니다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福音), 곧 기쁜 소식이라 부른 것은 그 말씀과 실천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또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라 나선 네 명의 어부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결단을 요구하는지를 말합니다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또 아버지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소중히 생각하던 인간관계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런 제자의 실천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어느 날하느님을 우리의 삶 안에 모셔 들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우리가 애착하는 인간관계와 사물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화려했던 우리의 꿈들도 그 실상(實狀)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면아무도 거역하지 못하는 인간 생명체의 순리(順理)입니다예수님은 우리의 의욕과 욕심과 꿈이 아직 살아 있을 때, 그것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게 살자고 가르친 분입니다하느님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녀가 되자는 운동을 일으킨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게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있게 살라는 말씀입니다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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