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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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23 ㅣ No.119194

 

2018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복음 요한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어렸을 때, 버스를 타려고

하면 거의 전쟁 같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필사적으로 타려고 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많은 승객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버스가 터무니없이

작아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타게 됩니다.

바로 버스 안내원의 힘 때문입니다.

작은 체구인데도 무슨 힘이

그렇게 좋은지 어떻게든

승객들을 모두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 버스 승무원은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없다면 버스에

온전히 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승무원은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버스기사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1989년을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변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변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산을 배워야 사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주산을 배우는

사람을 찾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성냥은 어떠합니까?

 아마 집에 커다란 성냥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라이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사람, 문화, 생각 등등

온통 변하는 것투성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지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바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코 이 모습을

 지혜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합니다.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와 보다

더 가깝게 해준 것을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고,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여준 것을 율법을 어기는

아주 못된 사람 취급을 해버립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신 과

거에만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악한 행동도 아니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행동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너무 심했던 당시의

유다인들의 모습을 묵상해봅시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요?

도무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집 센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지금은 볼 수 없는 버스안내원.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가족들이 여행을 가서

하루 24시간 내내 집에

혼자 있다는 상황입니다.

이때에 이런 감정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1) 난 무섭다. 왜냐하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2) 난 평화롭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난 지루하다.

왜냐하면 난 재미있고

즐겁게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4) 난 외롭다.

왜냐하면 누군가 같이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5) 난 즐겁다. 왜냐하면

혼자서 원하는 방식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정도의

정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각 감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다 옳습니다.

즉,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정까지도 옳고

그름의 잣대로 나누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어떠할까요?

다양성 안에서 일치란 모두가

똑같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양함을 서로가 인정하는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옳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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