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김웅렬신부(하느님만 가슴에 품고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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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23 ㅣ No.119209

 

"하느님만 가슴에 품고 사십시오"

+ 찬미예수님!

성모신심미사를 드리지만

오늘은 토요일 평일 복음인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강론하겠습니다.

사제로 살면서 가슴이

아팠던 적이 있었지만

요즘도 많이 아픕니다.

동료 사제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를

못 했다고 하는 자책감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한 20여 년 전에 되돌아보면

생각하기도 괴로운 사건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전화가 왔는데,

본인은 냉담중이지만

아무튼 세례명이

교우라고 밝힌

어떤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16살 때 집을 나와

10년 넘게 술집, 다방,

창녀촌을 전전했대요.

그런데 직장 다니고

있는 줄 아는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중신이 들어와

결혼이 성사되었대요.

결혼할 상대에게 수치스러운

과거를 밝힐 수도 없고,

속이고 결혼할까 생각도 했지만

언젠가는 어두운 과거가

밝혀질 것이 분명한데,

그때 그 파장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더랍니다.

죄스러운 과거를 영원히

숨긴 채 남편을 기만하면서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할까?’

고민 고민하다

자살을 결심하게 됐고,

죽기 전에 어릴 때 다녔던

당 생각이 났대요.

아무 신부님에게나

속마음이라도 다 털고

죽고 싶어서 114에

아무 성당이나

대 달라고 그랬대요.

그런데 그 교환수가

청주의 많은 성당 중에

하필이면 내가 있는

사제관 전화를 알려 준 거죠.

그러면서 그 자매가 하는 말

 “신부님, 말릴 생각 마시고

제 본명이 뭔데 기도나

 한 번 해 주세요.

저도 압니다. 교우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것.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어요.”

제가 전화 끊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애원해도

그녀는 냉랭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어요.

며칠 뒤 충북일보 사회면에

‘결혼비관 자살’이라고 하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어요.

한 아가씨의 자살하게 된

내용이 실려 있었는데 3일 전에

전화했던 그 아가씨였어요.

그때 저는 너무 괴로워서

아무한테도 말을 못했지요.

사제인 나의 한계를 느꼈고

많은 시간이 지나도록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팠어요.

그러면서 나에게 늘 떠나지 않는

묵상거리가 ‘죄의식’ 이었습니다.

죄의식이 그토록 한 영혼을

망가트릴 수 있구나!

과거에 살았던 그것 때문에,

죄의식 때문에.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면

죽지도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둘째아들이 달라 해서

흥청망청 씁니다.

그러다가 돈 다 떨어지고

굶어죽을 처지가 되니,

결국 아버지의 집을 향해 갑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죄의식은 둘째아들의

발목을 계속 잡았을 것입니다.

느린 걸음이지만 둘째아들은

세 발자국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두 발자국 오고,

다섯 발자국 가다가 다시

죄의식 때문에 열 발자국

뒤로 가다, 다시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나가고.

한편 둘째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고 난 후부터

아버지는 늘 둘째아들에

대한 걱정이었지요.

시간만 되면 옥상에 올라가

혹시라도 둘째아들이 오지 않을까

지평선 너머 멀리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새까맣게

비틀거리면서 오는 점을 봅니다,

그 순간 ‘내 새끼가 오는구나.’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 갑니다.

아버지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오니 둘째아들은

 ‘세상에 날 때리려고!’

하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먹은 게 없어 힘 뛰질 못하고

몇 발자국 못가

아버지에게 잡힙니다.

아버지가 둘째아들을

끌어안자 무서운 벌을

내릴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따뜻한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죽었던 네가

살아왔구나.’ 하면서

가락지를 끼워주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집에 데리고 와서

잔치도 벌여주었지요

둘째아들은 생각도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에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둘째아들이 돌아왔을 때

제일 손해를 막심하게

받은 것은 큰 아들이

아니라 살진 송아지였어요.

큰아들은 손해 본 것 없어요.

살진 송아지만

억울하게 당했지요.

일하고 온 큰 아들이

무슨 일이냐 물으니,

‘둘째도련님이 돌아왔다고

주인님께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창녀한테 빠졌던 놈이

 돌아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내겐 친구랑 즐기라고

염소 하나 안주더니?’

아버지가 나와서 달래시죠?

‘죽었던 네 동생이 왔잖니.

내 것은 다 네 것인데 왜 그래?’

그걸로 돌아온

탕자 얘기는 끝나요.

자, 저는 그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했어요.

수많은 영성신학자들,

문학가들의 얘기를

읽어봐도 돌아온 탕자,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없었어요.

과연 탕자가 끝까지

돌아온 집에 안 나가고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서두에 얘기했던

그 아가씨의 사건 이후로

나는 돌아온 탕자 이후의

모습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탕자가 끝까지

버티고 있었을까?

자,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즐거운 일이고 축하할

경사가 분명하죠.

그러나 그 감격과 축제의

 순간은 지나가버리고

실제적인 현실이

작은 아들한테 다가옵니다.

작은 아들한테는 정신적인

열등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죄의식입니다.

과거에 지었던 죄와 허물,

그리고 늘 날 괴롭히는

 양심의 고발이 그를

무던히도 괴롭혔을 것입니다.

또한 육에 속했던 옛 생활의

향수가 집밖으로

끌어내곤 했을 것입니다.

오랜 만에 찾아온 집안의

 분위기도 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제일 힘든 것은

 형님의 싸늘한 눈초리가

아니었겠는가?

이런 문제는 단순히

탕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죄 짓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그 죄 깨끗이 씻어낸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돌아온 탕자는 적어도 몇 가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버지 집을

분명히 기어나갔을 겁니다.

첫째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과거에 대한 열등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했던 죄.

허망하고 방탕하고 교만하고

방자했던 그 죄와 허물 때문에

괴로워하고 불안해

할 때가 많습니다.

낙태시킨 것 성사는 봤어도

늘 마음속에는 그 죄의식은

줄을 때까지

가지고 가게 될 겁니다.

죄 사함은 받고,

보속도 기를 쓰고 했고,

낙태시킨 아이들을 위한

위령미사는

봉헌해줬다 하더라도

눈처럼 우리 영혼이

평화로울 수가 있겠는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둘째아들은 그렇게 외치고

 들어왔지만 주변 환경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과거에 대한 열등감,

이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믿음만이 영적 열등감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이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는 고백소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미사 때마다

우리의 먹거리로 오시는

우리 주님을 영하게 됩니다.

알다시피 개신교에서는

죄를 사함 받았다고 하는

보증을 못 받습니다.

죄 지으면 혼자 골방에서

울던 부흥회 할 때 울던,

울었던 그 순간에는

죄 사함 받는 것 같겠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정말

내 죄는 용서 받았을까,

감정은 아니었나하는

의구심이 생길 겁니다.

우리는 사제의 입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너희의 죄를 사하노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과거에 대한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둘째아들은

튀어나갔을 겁니다.

아마 노숙자로 살다가 길에서

쓸쓸하게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죽음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럴 때 마다 어둠이 자꾸

떼어내려고 할 때 마다

뭘 잡아야 됩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Love.”

그것만이 우리를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두 번째로 둘째아들이 넘

어야 될 산은 육에 속했던

옛 생활에 대한 유혹입니다.

우리는 약한 인간이기에

 답답할 때는 예전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알콜 중독자, 노름꾼, 바람꾼.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세속, 육신, 마귀, 이 삼구와의

싸움에서 승리 거두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인성을

 시험해보고 지고 난 다음에

떠나가면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갔다.’

광야에서 예수님과 한바탕 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기회는 겟세마니 동산,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인성을 자극한 겁니다.

‘앞으로 당할 네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아니?

피해. 네가 굳이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걸을 이유가 없어.’

그러나 그 다음 말로 인성을

신성으로 이겨냅니다.

‘그러나 내 뜻으로 마시고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해 주소서.’

그러면 마귀가 포기한 줄 압니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에게 또 덤빕니다.

‘아이고 참 꼴좋다.

네가 메시아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야?

너는 버림받았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하죠.

예수님의 인성의 마음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셨나이까?’

얼마나 그 고통이 심했으면!

정말 예수님은 그 순간에

버림받은 느낌을 받은 겁니다.

마귀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유혹을 합니다. 덤빕니다.

하물며 약한 우리들은

조금만 정신 안 차리면

마귀의 밥이 됩니다.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나운

늑대처럼 마귀들은 우리들을

육의 생활로 끌고 갑니다.

둘째아들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꿀 속에서 한참 빠지다 나왔기

때문에 그 꿀이 그리울 겁니다.

몸뚱이는 옛 악습으로

자꾸 끌어당겼을 겁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둘째아들은 분명히

다시 나갔을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넘어야 될

산은 형과 같은 싸늘한 시선에

짓눌리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자꾸

가슴에 품다보면

우리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성당을 사람보고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오래 못 버팁니다.

돌아온 동생을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하지 못하는 형도 분명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런 형이 다 틀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형에게 꾸준히 인내를

갖고 정말로 잘하면 형도

언젠가는 변할 겁니다.

동네사람들도 언젠가는

 변할 겁니다.

돌아온 탕자가 왔을 때

동네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저 놈 한 달 안에

기어나갈 거야.

돈 떨어졌으니 왔지.

돈 훔쳐서 또 떠나갈 거야.’

인정을 안 하는 거죠.

그러나 꾸준히 열심히 살면

동네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때가 올 겁니다.

착하게 살려 해도 주변 때문에,

다른 사람 시선 때문에

못 산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항상 문제는 본인

자신한테 있는 겁니다.

담대해지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겁니다.

여러분, 세리 중에 제일 높은

세리장 자캐오 이야기 아시지요?

자캐오는 온 몸을 비단으로

두르고 돈은 많았지만 가슴에는

늘 찬바람이 쌩쌩 불었죠.

아무도 친구가 없는 것에요.

 길거리 지나가면 저 매국노,

저 앞잡이, 손가락질 당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죄인과 친구인

나자렛 선생님이 우리 동네를

지나간다는 말을 듣습니다.

자캐오는 궁금했습니다.

정말 아무도 친구로 여기지 않는데,

그분은 정말 나를 가까이 하실까?

비단옷입고 나오니까 인산인해!

덩치도 작아 어떻게 비집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갈 재간이 없었어요.

자캐오는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열심히 뛰어가서

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가요.

비단옷을 칭칭 입고

나무를 탈 수 있을까요?

훌훌 벗어 던지고 기관장인

자캐오가 나무를 탑니다.

나무를 올라갈 때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에요.

 지위고 명예고 자존심이고

다 내려놓은 것에요.

예수님이 지나가실

그 길가의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사람한테

휩싸여서 오시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가겠다.’

자캐오는 그 순간에

오만볼트 전기가 짜르르~

저분이 내 이름을

도대체 어떻게 아시지?

여러분, 본당신부님이

자기 본명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세례명을 부르면 좋죠?

‘너 내려와라.’가 아니었어요.

 “자캐오야,”

이름을 분명히 불렀어요.

제가 진천 본당신부 할 때는

신자들이 미사 들어올 때는

항상 이름표를

달고 들어오게 했어요.

성체 줄 때 ‘바오로,

그리스도의 몸. 루시아,

그리스도의 몸.’

너무너무 좋아해요.

여기서도 할까 말까

지금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으면서 고백합니다.

‘제 재산 반 다 내놓고

혹시 내가 해 끼친 것

있으면 몇 배로

갚아주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이라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포기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이 아닌 행동이

따라야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가가 뭔 줄 아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아낌없이 뭘 바치는지 말 좀 해봐요.

아낌없이 바친 것.

말로만이 아니라

아낌없이 바쳐야지요.

예수님이 들어가자마자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는

말을 하신 게 아니었지요?

자캐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어요.

정말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

네가 구원받았다가 아니에요.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그날 이후 자캐오의 처절한

회개로 인하여 자캐오

집안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집에

온통 하느님 모르는 사람,

미신쟁이 투성이라 하더라도

그 중에 한명만이라도 정말

하느님 앞에 매달린다면

여러분 집안을 구원해

주신다는 그 뜻입니다.

자캐오는 에수님을

만나기까지 주변 탓,

작은 키를 탓하지도 않고

 최선을 다해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면서

보시니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기까지의 과정을

다 아신 것에요.

저기 올라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든 걸 다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갈등이 있었을까?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되겠다.’

예수님 들어가신 후

자캐오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포기선언을 했어요.

‘세상 것 다 포기하고

주님만 얻을 수 있다면

저 아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영적 포기의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딱 한 마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정리해 봅시다.

돌아온 둘째아들은

세 가지 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분명히 다시 나갈 겁니다.

2000년 동안 돌아온 탕자에

대한 수많은 문학가들의

잉크를 흘리게 했던

복음 중의 복음.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도 나올 수 있는

복음이지만 돌아온 탕자의

그 이후 삶에 대한 얘기는

그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 언급한 그 자매의

죄의식으로 인한 자살사건

때문에 돌아온 탕자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돌아온 탕자가

잘 버틸 수 있었을까?

해피 엔딩(happy ending)

으로 끝날까?

형과의 사이는 어떻게 됐을까?

술집은 또 안 찾아 갔을까?

그 많은 생각들.

첫째, 돌아온 탕자는

영적인 열등감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만

아버지 집에 머물러 겁니다.

그 해법은 뭐라 구요?

‘아버지는 사랑이시다.’라는 믿음,

내 죄가 진홍색처럼 붉어

모두 손가락질 하고 돌을 던져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고믿음.

그 믿음만 있으면 어느 진흙탕

속에 있어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절대 아버지 집을 벗어나지 않고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육에 속했던

옛 생활에 대한 유혹을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경계해야 됩니다.

나이 많다고

그런 유혹이 없습니까?

나이와 상관없어요.

관 속에 갇힐 때야

내가 드디어 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구나!

세 번째로 극복해야 될 것은

주변의 시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

가슴에 사람을 담지 마십시오.

오로지 하느님만 채우십시오.

누가 나를 뭐라고 하든,

씹든, 뒷말을 하든,

나를 갖고 뭐라고 하던

저분은 알고 계시다!

사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은 종교인이지만,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면

신앙인으로 바뀝니다.

오늘 성모님께 봉헌하는

첫 토요일이지만,

저는 평일 복음을 가지고

강론했습니다.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복음이요,

내 뼈 속에 채워야 될

 복음 중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바로 우리들을 뜻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집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절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 절대 하지 마십시오.

또 이 안에서 살면서 사람에게

상처받아도 빨리 씻어 버리시고

하느님만 가슴에 품고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아버지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믿고 기도합시다. 아멘

 2018년 03월 은총의 밤 (3/3)

서운동성당 김웅열

-(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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