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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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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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24 ㅣ No.119226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찬미예수님

집안이나 동네에

마귀 들린 사람,

 아니면 정신병자가 있으면

수십 명.... 수백 명이

고통을 같이 당합니다.

더군다나 딸이 마귀에 들렸으니

그 에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정말 지옥 같았을 것이요.

그 딸의 치유를 위해서 엄마가

온갖 모욕을 무릎 쓰고

이방인이었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기적은 언제 일어나는지

선명하고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이 복음을 준비하면서

저는 네 손가락밖에 없는

피아니스트

이 희아를 생각했어요.

세례명은 히아친따

희아를 가졌을 때

초음파를 해보니까

이상하게 다리도 없고,

손가락도 네 개밖에 없고...

주변에서는 낙태시켜라....

낙태시켜라... 했지만

신앙 때문에..하느님 때문에

낙태시킬 수가 없었대요.

그 아이를 낳고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산에 갔다 버려라...

죽게 하라고...

저게 어디 사람이냐!

그런데도 길렀습니다.

아이가 저능아 판정까지 받았고,

유치원 유아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대요.

기가 막힌 과정을 거치며

마의 기도와 노력에 의해서

희아는 지금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서 해외공연도

현재 3년 정도 밀려있다고 해요.

몇 달 전에 희아가 자기 CD

몇 장과 편지 몇장을 보냈어요.

‘저는 신부님을 평화방송에서

매일 같이 보는 신부님 광팬입니다...

신부님 강론 듣고 열심히

엄마랑 살아가고 있고 제 노래

테입 보내드리니까 들어보세요.’

저번 일요일 인터넷

카페정모에 와서 피아노도 치고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데

저능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똑똑하고 말한마디...

하나하나가 사리 분별 있고

얼마나 똑 부러지는지..

.키래야 60 cm나 될까요?

다리는 아예 없으니까...

손도 몇 센티 안 되고

주님께서는 스스로 건강하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아픈 자들을 선택하실 때가 있고

스스로 완전하다고,

늘 교만에 빠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불완전한 사람을

선택할 때가 있어요.

그날 그 미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희아의 말,

그 밝은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불평불만 속에 살았던

자신을 회개하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손가락 네 개를 가지고

피아노를 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지금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

전 세계를 다니고 있습니다.

내년 5월, 성모성월에 한 번

불러서 공연을 한 번 할 겁니다.

10월에 하려고 했는데

외국에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어렵다고...

오늘 복음강론을 준비하면서

히아가 겹쳐졌어요.

희아 뒤에서 오늘날의 희아를

만들기 위해,  희아를 살리기 위한

그 엄마의 처절한 노력은

돈으로 된 것이 아니었어요.

오로지 기도와 희생으로

오늘날의 히아를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은 무수히 태어나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방에 갇혀서...

빛도 보지 못하고,

집안망신이라고 쉬쉬하고,

숨기고...그렇게 살다가 쓸쓸히

죽어가든지 아니면

꽃동네에 갖다 버리든지.....

내 십자가 내가 안 지겠다고

다 갖다 버립니다.

꽃동네 가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장애인 아이들이

갖다버려지는지 아십니까?

지 속으로 나도 지가

십자가 못 지겠다... 이겁니다.

그러나 희아 엄마는 오늘

예수님께 매달렸던 이 엄마처럼....

그래서 기적을 이루었어요.

열 손가락으로 잘 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네 손가락만

가지고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기 딸의

병의 완쾌, 구마를 청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유대인과는 조상 때부터

원수처럼 지내던 이방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처지인데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그 여인의 태도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으며

그 여인의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기적을

보여주실 수 있었던 것인가?

첫 번째 그 여인은 사랑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자존심이고

 수치심이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낯선 이방인인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고

계실을 때에도.... 몇 번이나

청해도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애원하였습니다..

거절을 당해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엄마의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 말고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힘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번째, 이 여인에게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처음부터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커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윗의 후손

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여느 위대하고 능력 있고

기적을 행하는 자!

예수님을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일종의 병 낫게 하는

마술사를 대하듯이

처음에는 만나서

‘다윗의 후손이어!’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당신 내 딸 좀 고쳐주시오....

다윗의 후손이여.’

신앙인이 성숙하지 못 할 때는

하느님을 단지 해결사,

병 낫게 해주는 능력 있는

 분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하다가 해결을 못 보면 

언제라도 신앙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점집을 찾아다니든지

철학관을 기웃기웃거립니다.

대부분의 우리 신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을 겁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종교심성상 기복적인 것이

강하기 때문에

올바른 크리스천문화가

가장 들어오기 가장 어려운

민족이 우리 한국민족이라고

종교학자들을 이야기 합니다.

기복이 강해서 저 영원한

세상보다는 이 세상 복을

더 귀하게 여기다보니까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교주노릇을 하며 사이비종교를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이 여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일 기도하면

문제해결해주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살려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보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어,’

하고 부를 때는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말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다윗의 후손에서 주님이라고

하는 호칭으로 바뀝니다.

이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느끼게 된 겁니다.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뜸을

들이면서 나를 마술사

정도로 아는지...정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병이나 고쳐주는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변화되기를

그 여인에게서 원했습니다.

이 여인은 거절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예수님의 신성을 느낍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순탄할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저 기복적이고

우리 집안 잘 되게 해 주고...

우리 아들 잘 되게 해 주고...

절에 다니던 사람이

부처님한테 비는 것과 바를 없이

건물만 교회로 바뀐 겁니다.

헤어나지 못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

그리스도가 해결사가 아니라

구세주라고 하는 그분의 신성을

여인에게 조금씩 느끼게 합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세 번째, 여인은 예배를

바치고 무릎을 꿇습니다.

뻣뻣하게 서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과 무릎을

꿇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은혜받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뻣뻣하게 서서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저절로 무릎을

꿇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어느 성전에 들어가더라도...

길바닥에 주저앉아서라도

저절로 무릎이 꿇어집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당신이 바로 내 주인이십니다,’

겸손의 표시입니다.

간청이 기도로 바뀝니다.

불굴의 인내로 모든 시험을

참아 이겨내면서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기도를

바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정말로 응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십니다.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시험을 하십니다.

여기에 걸려 넘어져서

많은 이들이 기도를 중단합니다.

강아지 취급받았다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더럽고 치사하다고..

예수님께 침 뱉으면서 물러납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강아지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강아지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오늘 이 여인의

신앙에 졌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개 취급 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청하여 딸의 치유라고

 하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내 눈으로 그 응답을 확인하려고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 자식 대에

올 수도 있고 100년 뒤에

그 응답이 올 수도 있습니다.

불굴의 마음으로

 항구하게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이 온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갔던

나오는 여인은

한 번 얘기해보고

 안 되면 물러나려는 자세로

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끝장을 보려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겁니다.

다만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윗의 후손이어’

했다가 그 분 앞에 섰을 때 

그분의 신성을 느끼면서

‘주님!’ 

뻣뻣이 서서 매달렸던

그 몽뚱아리가 무릎이

꿇어지면서

‘내 딸을 살려주십시오!’

사랑의 여인이었고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하는 것....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은혜를 받게 된 이 여인의

신앙이 성장하는

모습을 묵상해야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평상시에 기도는 하지도

않으면서 급할 때만 예수님 찾고,

예수님을 무슨 해결사 정도...

모든 것이 척척 이루어지는

마술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속에서 큽니다.

신앙은 가시밭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

애초부터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였지

모든 것이 평탄한 곳에서

 만나는 그런 순탄한

종교가 아닙니다.

미사를 하면서 영이 병들고

육이 병든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듯하게

아무 병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어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몸에 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몸 안에

성체로 들어오십니다.

성체는 천상의 약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우리의

약한 믿음을 보지 마시고,

우리가 청하는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청하면서

오늘 이 여인의

강한 믿음을 닮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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