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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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 (요한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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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4-20 ㅣ No.119886

 

 공동번역성서

 

영생의 말씀 (요한6:60~71)   
60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당신이 말씀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알아 채시고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며 자기를 배반할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예수께서는 또 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66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 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70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 열 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71 이것은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유다는 비록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나중에 예수를 배반할 자였다. 

 
 요한복음 6장 주제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빵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생명의 빵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이들만 먹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지요. 그런데 세상의 을 좇아 예수님께 나온 그 군중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만큼 세상은 생명의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 60절을 보시면 군중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조차도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어렵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크레로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용납하기 어렵다, 관용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 어려운 말씀하 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알기 쉬운 말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빵 이며 자신의 살과 피에 의해서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 참 생명은 본인들의 노력이나 자격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이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그 곳에 모인 군중들과 유다인들과 제자들까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야 한다는 그 말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유다인들과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고 그 분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들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주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죽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러한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제자들을 비롯한 그 곳에 모인 무리들은 그 사실이 마덥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다’라고 수군거린 것입니다.
 
주님은 즉시 그들에게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고 그들의 속내를 들춰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거슬린다는 말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주님의 말씀이 제동장치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가고자하는 방향을 정해놓고 그 방향으로의 행진을 위해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주님이 도와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진로에 태클을 걸고 들어오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뜻하는 바를 어떻하든 관철시켜 이 땅에서 행복과 만족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지 않아요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비록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그렇게 이 땅에서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하느님을 찾는 이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지적해 주십니다. 그게 본문 62절입니다. (요한6:62)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 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신학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의 선재(先在)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갑자기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신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이미 ‘이전에 있던 곳’ 즉 ‘하늘’에 존재하시던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게  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이들은 주님의 부활  승천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음을 고지(告知)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다하더라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많은 이들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5:4-8) 오순절 날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은 백 이십 명에 불과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까지 나누었던 제자들 까지도 그 후에 갈리레아로 돌아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만 이해되어지고 받아 들여지는 비밀스러운 하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러한 믿음의 제한(制限)성에 대해 잘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고전1:22~24)

 22 유다인들은 기적(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이스인(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만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63절에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에 속한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살려 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백성들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만 생명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영에 속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오로는 그 살려주는 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전15:45-46)
4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살려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빵이자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은 영적인 눈을 가진 하느님이 택한 백성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영에 속 한 말을 하고 있으니 육에 속한 너희들이 어떻게 알아듣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3절 후반부를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믿기만 하면 그 말씀에 의해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알아듣질 못합니다.
 
왜 주님께서 유다인들이 모여 있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까요?
유다인들은 율법만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요  단,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냈을 때만 가능하죠.(갈라3:12)  그리고 다 지켜내다가 중간에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을 모두 어긴 것이 됩니다.(야고2:10) 게다가 율법은 마음의 범죄까지도 단죄를 합니다.(마태5:21-28)
따라서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3:10)
그러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표면적인 행위에 의해 율법의 계명을 잘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화해서 지켜내었고 그 율법은 나중에 2134가지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2134가지나 되는 율법의 조항을 하나 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주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창세2:17)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보세요. 구약은 ‘먹으면 죽는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어야 하는 이들에게 해독제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6:50)
50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먹으면 죽지만 신약에서는 먹으면 살아납니다. (창세3:24)
24 이렇게 아담을 쫓아 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 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빵을 먹은 자들을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요한6:37)
37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창세기는 요한복음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저주는 예수 안에서 생명의 복음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지요.  생명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만 잉태되고 출산되는 것입니다. 즉 새 생명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 창조의 존재 양식인데 죄인이 그 새 창조의 존재양식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살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진리의 복음은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만 이해할 수 있지요, 따라서 육, 즉 옛 시대의 존재양식(구약)에 의하여 생명을 취하려 하는 이들은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이 63절을 통해 말씀하시려는 바인 것입니다. 주님의 그 말씀에 대한 증거는 곧 현실에서 나타납니다. (요한6:66)
66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 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 
주님의 그 말을 듣고 주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말은 주님을 좇던 제자 중에서도 여전히 옛 시대의 존재 양식(구약)에 의거하여 구약의 영광(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 세상의 영광)을 좇아 왔던 자들이 많았다는 것을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 곁에 남아 있었던 열두 제자들까지도 구약의 영광을 기대하며 주님을 좇았었다는 사실이 성경 여기저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르10:32~38, 41)   

32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다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장차 당하실 일들을 일러 주셨다. 

33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 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34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5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41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주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게 될지 그리고 어떠한 수난을 받게 될 것인지를 일러주시는데 이야기를하는 도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이야기를 끊고 한다는 소리가 주님이  왕이 되시거든 자기들을 우의정, 좌의정 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AD30년경이고 요한복음 6장의 가파르나움 회당의 이야기는 AD29년경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 제자들 또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다른 제자들이 떠났을  때 떠났어야 이야기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빵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 곁에 남아 있었을까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67절 이하입니다. (요한6:67-69)

67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69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많은 이들이 주님 곁을 떠나자 주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하고 기특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소유하고(에코, 계시매)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누구에게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이죠. 마치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 죄인들에게 하늘의 참 생명인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 하늘 복음의 비밀을 다 알 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특한 대답을한 베드로가 왜 주님께 우의정, 좌의정 시켜달라고 졸랐던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을 냈을까요? 자기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먼저 선수(先手)를 친 것에 화가 난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주님이 붙잡혀 가셨을 때 왜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을까요? 아니 왜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도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떠나버 렸을까요? 그 문제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가 다른 곳에서 동일하게 오늘 본문과 같은 기특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이 문제를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16:13~17) 

13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14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베드로가 ‘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이라고 고백을 함으로 주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메시아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한 베드로가 바로 이어서 주님의 죽으심에 분개하여 주님을 야단칩니다. 우리는 그러한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서 참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멋진 신앙 고백 후에 곧바로 주님을 꾸짖은 베드로의 행동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복음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한데 주님은 그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십니다. 그 칭찬의 근거가 17절인 것입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 사도 베드로는 여전히 불가능한 존재인데 순간순간 베드로를 이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그러한 기특한 고백들은 무엇에 대한 증거이겠습니까? 불가능한 베드로를 이끌고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의 현현(顯顯)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주님 곁에 묶어둔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보고 좇아온 무리들과  회당에서의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내 아버지가 이끌어 내게 주신 이 외에는 나에게 올 수 없다’는 선택과 예정(豫定)과 제한(制限)적 속죄에 대해 강화(講話)를 하시는 중입니다. 그 말미에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강권(强勸)적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베드로와 동일한 고백을 했던 다윗의 고백을 시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시편139:7~10)
7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8 하늘에 올라 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9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10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다윗이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그런데 그가 그렇게 주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8절에서 10절까지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좇아가신 것입니다. 즉 성도는 일단 하느님의 손에 붙들리면 그가 가는 곳마다 하느님이 쫓아다니시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집요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지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지금 베드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주님이신 것입니다. 여전히 베드로는 이승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멋진 고백 후에도 계속해서 이 세상의 힘을 좇고 세상의 권세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다 돌아가고 있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붙드시고 그의 입에서 기특한 신앙고백이 나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실수할 때마다 주님이 그를 붙들고 놓지 않으심으로 그가 위대한 사도로 생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신앙 상태를 요한이 잘 그리고 있습니다. (요한21:11)
11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데 밤새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을 알아보고 옷을 걸쳐 입고 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또 다시 그 분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이 추구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목숨 바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그 물고기를 셌습니다. 그 경황에도 일 백 쉰 세 마리의 물고기를 세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으시고 그들을 찾아 오셨어요. 그런데 그 앞에서 고작 물고기 백 쉰 세 마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때까지도 육신의 배를 채울 물고기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끝까지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을 좇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끝까지 좇아오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요21:18)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베드로에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며 당신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의 은혜를 배제한 삶은 단 한순간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은이가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을 인용하여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하며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자랑 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건 정말 은혜가 뭔지 모르는 우매한 이들의 허풍인 것입니다. 설령 그런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이끌림에 의한 것이지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자랑거리 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떠나시지 않으시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주님  붙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셔야 할 것은 자신의 유익과 자랑만을 위해서 사는 파렴치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이 세상의 힘을 얻어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척 연극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잡아주시지 않는 한 그는 끝까지 주님 곁에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나갈 때에 가롯유다가 끝까지 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신앙이 돈독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그는 그 무리의  돈 궤(櫃)까지 맡아서 수고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생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잡아주시는 그 순간에 가롯 유다를 향해 일갈(一喝)을 하십니다.  (요한6:70-71)

70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 열 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71 이것은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유다는 비록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지만 나중에 예수를 배반할 자였다. 
주님은 유다를 가리켜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70절을 보시면 그 마귀를 주님 자신이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열한명은 당신의 사도로 택하시고 한 명은 마귀의 역할을 하도록 주님 자신이 택하여 당신 곁에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유다가  마귀인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택하셨을까요?
많은 성경 주석가들이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택해서 삼년 반 동안 당신 곁에 제자로 두신 이유 중 첫 번째 이유는 주님의 완전성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38절과 39절에 보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오셨음을 천명(闡明)하십니다.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히브리서에도 똑같이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히브10:7)
7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이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두루마리 책이란 구약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루가24:44)
44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그런데 구약에 주님을 가리켜 기록된 글 중에 주님은 친한 친구의 배신에 의해 팔릴 것이라는 게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시편41:9)
9 흉허물없이 사귀던 친구마저 내 빵을 먹던 벗들마저 우쭐대며 뒷발질을 합니다. 
주님은 구약에 자기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내용이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삼년 반 동안 자기를 대적하는 마귀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두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위해 유다를 선택하여 당신 곁에 두신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애쓰셨는지 시편 22편으로 가서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시편22:1)
1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지요?  바로 이 구절을 주님께서 그대로 아람어로 인용하신 것입니다. ①주님은 이처럼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유다까지도 당신 곁에 두신 것입니다. (요한17:12)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②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완전성에 대한 편견 없는 증거를 제공하시기 위해 마귀의 편인 유다를 당신 곁에 두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다른 사도들과 구원받은 많은 이들이 주님의 완전성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주님의 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증거가 편벽(偏僻)되고 편향(偏向)된 증거로 폄하(貶下)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를 곁에 두시고 그 원수에게서도 도덕적 완전성을 인정받으셨던 것입니다. 유다는 마귀의 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곁에 꼭 붙어서 어떻게든 주님의 약점을  잡으려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마귀는 주님의 도덕적 결점이나 흠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마태 27:4)는 고백으로 주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③세 번째로 주님이 유다를 선택하셔서 곁에 두신 이유는 죄의 흉악함을 드러내고 그러한 죄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엄숙한 경고를 발(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는 구세주와의 교제가 허용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들 중에 최고의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느님과 함께 먹고 마시던 이도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하느님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팔아먹을 수 있는 흉악한 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이적들을 목격하고, 지극히 영적인 가르침들을 듣고, 지극히 경건한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할지라도 하느님의 이끄심이 없이는 결코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유다의 선택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④네 번째로 유다의 선택은 교회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있을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신자로 자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재산과 가족마저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전도도 했습니다.(마태10:4) 기적도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주님은 마귀인 그에게도 그런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떤 반대도 드러내지 않았고 최후의 날까지 주님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 과월절 만찬에조차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태연하게 그의 발을 주님께 맡겼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감췄는지 제자들이 끝까지 그가 가짜인지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기 전의 우리 인간들의 판단력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영적인 것과 전혀 상관없는 죄인들은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들만을 판단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제자들이 마귀인 유다를 식별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판단력을 발휘하여 사람과 사건과 상황 등을 해석하고 있습니까?  잘 안 되지요?  오죽하면 사도 바오로도 그의 서신에서 다시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고 반복하여 다짐하고 또 다짐하겠습니까?  (고후5:16)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하느님이 죄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는 표현을 쓰시겠습니까? 죄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경중(輕重)과 귀천(貴賤)을 가르는 우(愚)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40절과 41절을 다시 볼까요? (요한6:41~42)
41 이 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42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곳의 군중들이 뭐라고 수군거립니까? ‘그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고 그의 부모도 우리가 아는데 어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을 통해 예수를 판단합니다.
세상이 합의(合意)해 놓은 귀천과 경중의 개념을 판단의 잣대로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소경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야고보 사도의 경고를 다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2:1-4)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습니까? 그 분을 외모로만 보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왜 열한 제자들이 유다가 마귀의 편인지를 식별해 내지 못했을까요? 외모로만 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정말 영적인 눈을 뜨신 분들 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세상적 가치관에서 볼 때 낮고 비천한 지경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시면 안됩니다. 반대로 많이 가졌다고 해서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가난함과 모자람을 비웃으셔도 안 되고 다른 이들의 풍부함을 질투하거나 비꼬셔도 안돼요.
그게 잘 안 되거든 차라리 육신의 눈을 질끈 감아버리세요. 육신의 눈을 감아야 영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 눈을 감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5:17)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새 것들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이여, 육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십시오. 상대방의 겉모습을 지나 그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귀한 영혼을 바라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절 대 사람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우리의 눈도 그렇게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조작해 놓은 세계관과 그에 따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분명 그렇게 변해가고야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확실한 소망 안에서 우리의 손과  발을 열심히 움직여 보십시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주님을 떠나 과학문명이 주는 편안함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물질주의와 실용주의와 성공주의 같은 시대 정신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종교 등의 수많은 선행체계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옛 사람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복음을 아는 우리는 뒤 돌아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어 있어야 우리는 참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 가겠습니까? ’ 하느님은 그 분의 집요한 고집으로 우리에게서 반드시 이 고백을 들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아멘.
  

 

 

 

이제 요한복음 6장을 마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우리들이 정말 성경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옳바로 알고 깨달을때,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알수 있어요.

이글이 교형자매님들께 작은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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