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22)

스크랩 인쇄

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4-22 ㅣ No.119940

 

2018년 4월 22일
부활 제4주일

제1독서 사도 4,8-12 

그 무렵

8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제2독서 1요한 3,1-2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요한 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신학생 때,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을 보면

너무나 멋져보였습니다.

25년이라는 그렇게

긴 시간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신부님은 정말로

존경스러웠고 당연히 교회의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년째 사제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서 과연 멋진 사제로

살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아직 5년이나 남았으니

5년 뒤에는 은경축을 맞이했던

 그 과거의 신부님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가 있을까요?
솔직히 나이 마흔이 되면

멋진 중년이 될 줄 알았습니다.

논어에서 40세를 불혹이라고 해서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즉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나 쉽게 흔들리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방황했던 30대에 제게 마흔은

인생의 정점을 찍는 시기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흔을 넘어서 이제

하늘이 정해준 명을 안다는

지천명인 오십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전히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벌써

오십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네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많이 내세우고 있습니까?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억지도 얼마나 많이

부리고 있습니까?

사실 이렇게 억지 부리며

생떼를 쓰는 모습을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습니다.

아마 멋진 중년의 모습이 아니라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면서 피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해마다 맞이하는

 ‘성소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부르는

성소(聖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는 부르심도,

또한 가정을 이루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결혼 성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생활하는데 어떻습니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추는 큰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성소’를 받았습니다.

 즉, 성소는 겸손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맞게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모든 부르심을

존중하고 있지만,

오늘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면서,

성소 계발과 육성을 위해

어느 누구도 제외 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큰 모범을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는 곧 신앙생활의 단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주님의 일꾼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성소자의 수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할

일꾼들이 줄어들면서

교회를 찾는

신자들의 숫자 역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신 주님이십니다.

(요한 10,11 참조).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것이지요.

이는 곧 당신의 모습을 보고

따르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세상의 것이 좋다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성소계발과 육성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도 베드로는 주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

(사도 4,12 참조)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의

 우리 밖에서만

머무르려고 할까요?

 이제는 주님을 있는

그대로 뵐 수 있도록

(1요한 3,2 참조)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겸손한 모습으로 제대로

응답하는 것,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과 힘을 실어 주는 것

등을 통해 가능하게 됩니다.
또 다시 맞이하는

성소주일입니다.

단순히 신학교나 수도원

방문하는 특별한 날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리더는 추종자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더 많은 리더를 만들 뿐이다.

(톰 피터스)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몰두했기에"

(‘좋은생각’ 중에서)

일본 양말 회사 ‘타비오’ 설립자

오치 나오마사는 50년 넘게

양말을 만들었다.

그는 평소 맨발에 샌들 차림이었다.

양말의 착용감, 조이는 정도 등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늘 감각을 예민하게 유지했다.
“양말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말하는 이들에겐 이렇게 답했다.

“작은 차이가 최고의 품질을 만들지.

그 차이를 만든 건 마음이야.”
그가 양말 도매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할 때였다.

점장이 말했다. “음악가와 화가가

자기 생각을 그린 게 악보와 그림이야.

양말엔 양말 장수의 마음이 나타나.

양말을 너 자신이라고 생각해.”

그날부터 오치는 양말에

인생을 걸었다.

휴일은 한 달에 반나절.

그때마다 백화점에 가서

어떤 양말이 진열되고,

잘 팔리는지 관찰했다.

점원 몰래 볼에 대거나

깨물어 촉감을 확인했다.
1970년대 후반,

회사를 창업한

오치에게 위기가 닥쳤다.

질 낮은 양말을 세 켤레에

 천 엔으로 묶어 파는

제품이 유행했다.

“우리도 값싼 제품을 만들자.”

라는 직원들의 목소리에도

그는 질을 우선으로 삼았다.

2년 뒤, 다시 품질을 중시하는

풍조가 돌자 엄청난

주문이 쏟아졌다.
일흔 살 되던 해,

의사가 발이 차면 건강에

좋지 않다며 양말을

신으라고 권했다.

상인은 목숨보다 제품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에게 양말을 신는다는 건

 ‘목숨이 양말보다 중요해졌다.’

라는 뜻이었다.

그는 사장 자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완벽하게 몰두할 대상이

있었기에 정말로 행복했네.”

비행기 안에서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90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