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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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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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4-24 ㅣ No.119976

 

 2018년 4월 24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 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복음 요한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남자의

나이가 더 많지만,

이 부부는 반대로 자매님이

 형제님보다 15살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자매님은 재혼한 것인데,

상처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지금의 남편의

나이 차이는

10살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딸과

남편이 부부 같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부부는 늘 손을 꼭 잡고

다니면서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과시하듯

다녔습니다.
이 둘이 결혼하기까지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매님도 이 반대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지요.

매일같이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 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끼리

사귀여야지. 이게 원칙이야.”
이 말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젊은 남자 친구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 같고,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사람의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요.

 이런 마음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자매님께 형제님은

이렇게 말해주더랍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젊은 사람끼리 사귀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귀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말에 둘은 결혼을 할 수가 있었고,

지금도 서로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사람들에게 표시하면서

다닌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랑이 가장 큰 원칙인데,

 왜 다른 것이 원칙이라고 말하면서

 사는 것일까요?

주님을 따르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직접 당신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만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보지 않고

 다른 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라면서 예수님께 따지듯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원칙인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는

 기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보여 지는 기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역시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는 사람만이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변함없이

중요한 단 하나는

바로 사람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다.

(파비안 직스투스 쾨르너)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우리를 위해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알랭 드 보통의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끝이 있다.

 잠깐 멈춰 서서 그 사실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시련의 파도를 넘다 보면

 아름다운 구름,

꽃 한 송이처럼 일상의

사소함을 생각하게 된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굴레 속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불안이라는 것보다는

 만족과 작은 기쁨 안에서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하는

바로셀로나 성가정 성당 내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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