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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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뽁 나루터에서의 씨름 (창세31:1-3, 3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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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27 ㅣ No.120736

공동번역성서

 

얍뽁 나루터에서의 씨름

(창세31:1-3, 32:21~32)

31:1 야곱은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 것을 모조리 가로채고, 우리 아버지 것으로 그 모든 재산을 이루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2야곱이 라반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3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당신네 아버지의 얼굴을 살펴보니 나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소. 그러나 내 아버지의 하느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셔 주셨소.

32:21 특히 '당신의 종 야곱은 뒤에 오십니다.' 라는 말을 잊지 말라고 일렀다. 선물을 먼저 보내어 에사오의 마음이 풀어진 다음에 만나면 행여 자기를 반겨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22 그래서 야곱은 선물을 먼저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을 천막에서 묵었다. 23 바로 그 날 밤, 그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나루를 건넜다. 24 그들을 데리고 개울을 건넌 다음 자기에게 딸린 모든 것도 건네 보냈다. 25 그리고 야곱은 혼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26 그분은 야곱을 이겨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를 다치게 되었다. 27 그분은 동이 밝아 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놓아 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28 일이 이쯤 되자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었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29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이 말을 듣고 30 야곱이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분은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 보느냐?' 하고는,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31 야곱은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 하면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불렀다. 32 그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떠올랐다. 33 이스라엘 사람이 오늘날까지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 것은 야곱이 환도뼈를 얻어 맞아 그 힘줄이 상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만물의 終局을 이미 확정 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확정된 것들을 인간들에게 쏟아 부으십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時間이라고 감지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흐르는 시간속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배워가며, 감탄하면서 가는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이며 시간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창조이전이라는 과거에 확정되어버린 미래에서, 거꾸로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면서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완성하면서 가고있다고 생각을하며 달려가고 있지만 그 모든것들은 이미 하느님께서 완성하시고 확정시켜 놓으신 결론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것들이라는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창조이전에 요한묵시록의 종말을 완성해 놓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도 이미 창세전에 준비되어졌고 심지어 그 예수는 창조이전에 죽임을 당했다라고까지 성경은 이야기하고있습니다. (묵시13:8, 베전1:19-20) 창조이전에 성부하느님과 성자하느님의계약, 그리고 그 계약의 내용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성취된 하느님나라라는 결론에서부터 시간이 太初(한처음)(창세1:1), 레시트로 시작이된 것입니다. 이미 미래가 결정이 되어졌고 그 결정되고 확정된 미래로부터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시작점은 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백성이고 아닌가는 하느님의 계획속에서 이미 결정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聖徒에게 永生이라는 을 주시기로 이미 창조이전에 결정하시고 확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간속으로 던져진것입니다. 하느님이 마련해주신 새옷을입고 새로운하늘과 새로운땅에서 살기로 결정이된 사람들이 무언가 필요에의해서 옛하늘과 옛땅에 옛사람의 몸을입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사람들이 과거라는 곳으로 내려와서 그 확정된 미래로 무언가를 경험하고 배우며 한발한발 가고있는것이 歷史인 것입니다. 어떤 必要에서 일까요?

그들은 이 옛하늘과 옛땅에서 옛사람의 몸을 입고 그 옛 사람의 한계와 어두움과 추악함을 경험하고 배우면서 그 껍질을 하나하나 벗어버리며 이미 창조이전이라는 過去에 결정이된 그 結論이 얼마나 엄청나고 감사한 것인지를 배우게되는 것이고 이성과 인격을 소유한채, 자발적으로, 다시는 그 옛세상과 옛사람이 내어놓을 수밖에없는 더러운 열매들을 추구하거나 所願하지않는 자로 回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聖徒人生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느님과 옛사람과의 씨름이 필연적으로 수반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옛사람이라는 옷은 하느님을 떠난 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을 쟁취할 수 있다고 하는 아담표 옷인데 우리 스스로는 절대 그 옷을 自力으로 벗어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옛사람 아담은 반드시 전쟁을 치르게 돼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옛사람 아담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하느님이 승리를 하셔야지요. 하느님이 승리를 하시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옛사람이 패배를하게 될 때 우리는 참된 승리를 전가 받게 되어, 그때 우리의 완성된 신분이 온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을 설득하고 졸라서 우리의 뜻과 비전을 관철시키는 자로 사는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삶, 즉 하느님이 우리를 이기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종으로 부리면서 그 분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얍뽁강 사건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縮約해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服中에 지어지기도에 영원속에서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창세전에 하느님나라 백성으로 완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받은 자라는 確定未來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반드시 그 복받은 자의 자리로 收斂되고 完成이 되어져야합니다. 그것은 必然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야곱이라는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 하느님과의 씨름을 통과하며 그 옷을 서서히 벗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나라에서의 身分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전체의 야곱의 삶을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얍뽁강 사건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유약하고, 비열하며, 사기성 많은 야곱을 안타까우리만치 쫓아가시며 당신의 約束하십니다. 그가 뭘 잘해서도 아니고 그가 뭐 대단한 資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身分, 그의 미래가 이미 창세전에 하느님 아들로 확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옷을 입고 있건 거기에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그건 하느님이 그가 어떤 옷을 입고 있건 결국 그의 옛 사람의 옷을 씨름하여 벗겨 버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약속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같이 미련하고, 우매하며, 유약하고, 야비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야곱이라는 옷을 벗기시기 위해 그를 쫓아다니시면서 그가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야곱은 열심히 자기의 꾀를 이용하며 자기 살 궁리를 하고있는데 하느님은 계속 쫓아가시면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그러한 야곱의 삶에 만족하시지도 못하고 만족할 수도 없다는 하느님의 의사표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옛세상 안에서 야곱이라는 옛사람의 옷을 입고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안주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와 씨름을하여 그 옷을 벗겨내시는 분이지 그 야곱이라는 옷에 금장을 둘러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복된 추격이 야곱을 얍뽁강 나루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와의 본격적인 씨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얍뽁강에서의 하느님과 야곱의 씨름 사건은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하느님과의 씨름의 축약이요 모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얍뽁강가에서의 씨름은 하느님께서 수십년동안 야곱을 방치해 두셨다가 어느날 찾아오셔서 시작된 씨름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울러 그 얍뽁강가에서의 씨름은 전체 교회의 인생을 단적으로 아주 잘 표현해 놓은 훌륭한 축약인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야곱이 벗어야 할 그 옷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유산 상속권을 빼앗기 위해 형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장자권을 사기도 하고, 장자에게 주어지는 아버지의 축복을 도취(盜取)하기 위해 염소새끼 가죽을 뒤집어쓰고 아버지를 속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베델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과 흥정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도와주면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다는 약속을하지요? 결국 외삼촌 집으로 쫓겨간 야곱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기의 꾀만을 의지하여 온갖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많은 재산을 모읍니다. 그런데 그러한 외삼촌이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안색이 안 좋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자 그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 외삼촌을 떠날 계획을 세웁니다. 외삼촌이 양털을 깎으러 나가자 야곱은 자기의 가축들과 식솔들을 모두 챙겨 황급히 도망을 칩니다. 찌되었든 도망자인 자신을 거두어 주었고 자기에게 두 딸을 준 장인어른입니다. 그런데 인사 한마디없이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당시 牧畜을 하던 사람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일년의 농사를 추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날 며칠 계획을 잡고 모든 노비들과 가족들을 다 동원하여 해야 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기 것을 모두 챙겨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자기 집의 守護神인 드라빔을 훔쳐서 달아나는 사건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드라빔이라는 것은 여자의 모양을 한,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 우상을 말합니다. 그 드라빔은 가족 수호신일 뿐 아니라 재산의 상속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왜 라반이 그 드라빔을 찾기 위해 삼일 밤낮을 달려 야곱을 쫓아왔는지 아시겠지요? 나중에 야곱이 자기의 드라빔을 가지고 와서 자기 재산의 상속권을 주장하면 꼼짝없이 재산을 다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왜 성경이 야곱의 도주 장면에 그의 아내의 허물을 그려 놓았을까요? 그렇게 드라빔을 훔쳐 낸 라헬의 소행은 바로 야곱과 야곱으로 대표된 모든 죄인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최초의 부부의 主禮를 서시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거기에서의 한 몸은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의 그 聯合이라는 말은 아교로 붙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연합이 떨어지려면 둘 다 큰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성도와의 연합은 절대로 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夫婦라는 관계가 한시적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라헬의 소행은 바로 그녀와 연합 된 야곱의 소행인 것이고 그 야곱의 소행은 그가 대표하고 있는 이스라엘, 즉 교회의 소행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지금 그러한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통하여 하느님이 씨름하여 죽여 버려야 할 야곱이라는 죄인들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안전과 보호,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는 어떻게 되든 말든 그들의 재산권까지도 훔쳐내고 강탈하여 자신의 힘과 부를 챙기는 그러한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야곱들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야곱들과 씨름을 하시면서 그 들의 옷을 벗겨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한 마디로 하느님과의 씨름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철저하게 패배해야 할 야곱의 모습을 계속해서 폭로합니다. 라반은 삼일 만에 야곱의 일행을 따라잡습니다. 이제 야곱은 라반과 그의 군사들에게 요절이 날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저녁에 하느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야곱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는 협박을 하십니다. 일은 다 야곱이 저질러 놓았는데 하느님이 그 뒤를 쫓아가시면서 해결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야곱이라는 옷을 다 벗기 전에 야곱이 죽으면 안 되거든요. 야곱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좇아오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31:42) 42 만일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버지 이사악을 돌보시던 두려운 분이 제 편이 아니셨더라면, 장인은 저를 빈털터리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보람 없는 고생을 했는지를 살피시고 어젯밤에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런 걸 我田引水격 해석이라 하지요? 하느님이 자기의 수고를 인정하셔서 외삼촌을 혼내신 것이니까 이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훈계를 합니다. 어째든 하느님은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시며 그를 좇아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당신께서 베델에서 약속하신것처럼 항상 야곱과 함께 있으며 그를 떠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의 사자들을 보내셔서 직접 보여주시기도 하십니다.

 

(32:1~2) 1 이튿날 아침 라반은 일찌기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을 맞추고 복을 빌어 준 다음 길을 떠나 제 고장으로 돌아갔다. 2 야곱도 길을 떠났다. 그는 도중에 하느님의 사역꾼(군대)들과 마주쳤다.

야곱이 마치 엘리사와 게하지(열하5,20), 그리고 여호수아가 보았던 것과 같은 야훼의 군대를 보는 장면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손에서 풀려난 야곱이 또 다시 넘어야 할 산은 형, 에사오의 산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너를 앞서가며 너를 지키고 있으니 너는 그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당신의 군대를 야곱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기서 쓰인 만나다, 파가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부딪히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을 의도적으로 끈덕지게 쫓아다니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환상이나 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보고 만난 것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당신의 사자들을 직접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앞서 가며 싸우고 있으니 내 약속을 믿고 걱정 말고 따라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지키고 있는 그러한 하느님의 군대를 보고서도, 먼저 보낸 사신으로 부터 에사오가 400인의 군사를 데리고 자기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야곱이 두려워 떱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기의 꾀를 이용하여 살 궁리를 합니다 

(32:7~8) 머슴들이 다녀와서 야곱에게 고하였다. '주인님의 형님 에사오께 다녀 왔습니다. 에사오께서는 지금 사백 명 부하를 거느리고 주인님을 만나러 오십니다.' 8 야곱은 덜컥 겁이 나고 걱정이 되어 일행과 양떼와 소떼와 낙타떼를 두 패로 나누었다.

 

참 한심하지요? 그는 하느님께서 외삼촌 라반을 협박해서 자신을 구해주신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도 자기를 지키고 있는 하느님의 천군천사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이렇게 합니다 

(32:10~13) 10 그리고 나서 야곱은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앞길을 열어 주마고 약속하신 야훼여! 11 당신께서 이 종에게 베푸신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12 저를 형 에사오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에사오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13 당신께서는 '네 앞길을 정녕 열어 주고 네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나게 해 주마.' 하시지 않으셨읍니까?'

그가 하느님의 계약을 들먹이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의 재산과 자기의 가족들이 그의 주관심사입니다. 이 기도를 마친 후에도 그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의 꾀를 사용하여 살 궁리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럴듯하게 기도도하고, 예배도하고, 찬양도하고, 종교행위도 많이하는데 결국 우리가 추구하고 소원하는 것은 나의 계획이고, 나의 야망이며, 이 세상에서의 나의 미래에 관한 것들이 아닙니까? 거기에 하느님은 그냥 조력자에 불과한 분 아닌가요? 하느님은 바로 그 야곱의 옷을 향해 씨름을 하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당신의 계획안에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죄인들이 입고 있는 옛사람과 싸우시며 그들을 정복해가고 계신 하느님의 씨름을 상징하고 있는 야곱의 삶, 다른 말로 우리 교회의 인생에 하느님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얍뽁강 나루터의 씨름이야기인 것입니다. 或者들은 이 얍뽁강 나루터의 씨름 이야기를 强請祈禱의 능력을 설명하는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해석입니다. 야곱처럼 끈질기게 하느님께 매달리면 하느님도 그 정성에 감동하셔서 결국에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야 만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씨름하여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좌를 흔들어서 하느님의 뜻을 돌이켜 내 뜻을 관철시키라는 말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그게 왜 터무니없는 해석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호세12:1-6) 1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나를 에워쌌고 이스라엘 가문은 속임수로 나를 둘러쌌다. 그러나 유다는 사뭇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거룩한 하느님에게 충성을 바친다. 2 에브라임은 바람이나 먹고 살며 날마다 열풍이나 쫓아다닌다. 거짓말만 하고 허풍만 떨며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에집트에 기름을 선사한다. 3 야훼께서 유다를 심판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에 따라 벌하시리라. 그 한 짓을 따라 벌하시리라. 4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늘어졌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하느님과 겨루다가 5 하느님의 천사에게 짓눌리자 울며 애걸하지 않았더냐? 베델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거기에서 약속을 받지 않았느냐? 6 '야훼, 만군의 하느님, 그의 이름은 야훼시라.'

호세아가 야곱의 얍뽁강 나루터의 씨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얍뽁강 나루터의 씨름 이야기를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실패와 패역함을 꾸짖고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유다, 즉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지적하면서 야곱의 씨름을 인용하지요. 너희들 왜 하느님께 덤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야곱이 씨름을 한 사건은 야곱이 목적하는 생애와, 소원과, 목표와, 야망 등을 하느님과 씨름하여 관철을 시키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목적하는 생애와, 소원과, 목표와, 야망 등은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시고, 그 분의 백성에게 목적하시고, 이루시려는 내용과 함께 병행될 수 없어서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위기의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자기의 꾀와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대로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름을 해서라도 부수어 버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뽁강 나루에서 숨어있던 야곱에게 하느님이 시비 거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야곱의 인생 속에 나타난 수많은 갈등과 시비와 다툼은 사실 형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외삼촌 라반과의 싸움도 아니고 바로 하느님과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들으라는 하느님과 나의 뜻대로 살겠다는 야곱이 씨름을하며 충돌해 온것이 바로 야곱의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이 얍뽁강 나루터의 씨름 이후의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과 씨름을 하며 삽니다. 베델로 올라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겜에서 머물다가 딸의 강간사건을 겪으면서 다시 베델로 올라가지요? 그런일을 겪은 후에도 그의 가족들이 우상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을 했던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그 우상들을 다 묻게 하십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험악한 인생으로 끝나지요 그 말은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 씨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하느님을 대적하고 심지어 적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삶을 수시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평생에 걸쳐 그들과 씨름하시며 그들의 겉옷을 벗겨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의 씨름으로 點綴되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씨름에서 기필코 승리를 쟁취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게 시간과 역사의 존재 목적이며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단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의 씨름이 그치지 않기 때문에 피곤하고 고단하고 힘이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복 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도 나타난 것처럼 우리의 옛 自我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하느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하느님도 이길 수 없을 만큼 집요하게 어두움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계획과 야망,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느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여 씨름하며 죽여 버리려 하는 인간의 더럽고 집요한 죄성이 가장 극명하게 폭로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 씨름하여 결국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고 승리의 잔치를 벌인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이 죄인들과의 씨름에서 그들에게 져버린 꼴이죠. 그런데 그 자리에 하느님의 은혜가 부어져요. 창세전에 복을 받기로 택해진 어떤 일련의 야곱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사흘 만에 이스라엘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계속해서 하느님과 씨름하여 그 분을 죽이려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은혜가 닥쳐와서 그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해 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 이외의 죄인들은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들의 최후를 미리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저주받은 자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죄인들 자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시도다 하느님의 지혜여!’를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마저도 이기려 하는 인간들의 이기심과 탐욕과 자아숭배를 자기 아들의 품에 넣어 죽이시는 사건을 야곱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으로 표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마저도 이겨서 자신의 유익을 챙기려했던 야곱의 추악한 고집이 하느님에 의해 꺾이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뼈라는 것은 전인(全人)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죄인으로서의 야곱의 전존재가 하느님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지 않고 그를 품어 안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로 살아납니다. 하느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시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댑니다. 야곱, 속이는 자, 강도입니다. 그게 바로 죄인들의 정체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아버지, 형도 속이고 아비의 드라빔까지도 도둑질해서 나오는 지긋지긋한 죄인들의 실체, 그 실체가 하느님 앞에서 폭로 되는 것입니다. 나자로의 이야기에서는 이 부분이 어떻게 묘사가 되었지요?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풀풀 나는 썩은 시체 나자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폭로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하며 아무것도 아닌(nothingness)자로서 하느님 앞에 겸손히 서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기로 하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표지 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하니까 굉장히 영광스럽고 대단한 이름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32:29) 29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하느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교회의 이름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 건 사실 굉장히 면목 없고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그 말은 우리들 자신은 뭐 대단하게 잘나고 적당한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느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기려 하는 그러한 자들인데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와 불가항력적 은혜를 쏟아 부으셔서 완성해 낸 겸연쩍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이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聖徒는 평생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즉 스스로를 위해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짓밟고 심지어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였다 는 것을 폭로당하고, 확인하며, 수긍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단 한순간도 서 있을 수가 없는 절름발이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이김 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지팡이신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올바로 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평생 지팡이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 된 실체를 반추하고 기억했으며, 결국에는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그 분께 의탁한 자로 그 분의 품에 안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과 씨름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어떤 이들은 죄를 향한 하느님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느님의 공격으로 그들이 겉에 입고 있던 헌 옷을 난도 질 당하고 그 안에 있는 새 옷을 드러내게 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씨름을 하여 자기들에게 입혀진 새 옷을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그 새 옷을 입게 되었지요? 십자가입니다. 하느님께서 자기를 대적하는 세상에 게 져서 맞아 죽으시는 방법으로 그 새 옷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니까요. 야곱의 얍복 강 씨름 이야기가 어떻게 복음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아시겠지요?

이렇게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와 전쟁을 하고 계십니다.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백마를 탄 예수는 바로 우리를 향해 창을 겨누고 돌진 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우리 안에 숨겨진 보물 같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한 복된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쉴 새가 없습니다. 똑같이 신호 위반을 해도 우리만 걸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떼먹어도 꼭 우리한테만 찾아오셔서 하느님이 직접 징수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하느님 왜 나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혀요?’ ‘하느님, 내 치사해서 이제 하느님한테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쫓아다니면서 방해나 하지 마세요.’ 하고 하느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요? 그게 바로 하느님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진짜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답게 만드셔야 합니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이미 결정하고 확정해 놓은 당신 자녀들의 자녀다움을 찾아주시기 위해 그들이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늘 재수 옴 붙은 사람처럼 아주 작은 흠과 티도 발각이 나고 폭로를 당하 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느냐고, 왜 나만 이렇게 재수가 없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하느님이 걸어오시는 씨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된 것입니다. 아니, 원망이 나오면 원망을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우리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느님께 대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과 사람과 싸워서 이길 궁리만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느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내셨는가에 감사하고 감격하세요.

우리는 이미 복을 받기로 확정되고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信者는 거기에서 빠져 나가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주시는 그 은 나를 부인하고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뢰하는 영생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부인해야 할 가 나의 피와 살 과 뼈 속에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단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성도에게 있어서 필연인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세요 야망을 부인하시고  욕심을 부인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절름발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우리의 지팡이이신 하느님을 붙드십시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며, 완성된 미래에서 흘러오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창세전에 확정된 결론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미래에다가 자신들이 이루어내서 채울 업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속에 결정되고 확정된 자신들의 결국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 완성된 결론을 얼마만큼 배우고, 알아차리고, 인식하면서 살아 왔는가와 지금 내가 그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현재 내가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가 개척하고 이루어 내야할 이 세상에서의 미래나 거기에서 뭇 사람들에게 얻어내는 평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거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확정된 미래를 향한 하나의 거쳐야 할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완성된 미래에 안착하기 위해 거기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고 무엇 을 배우고 있는가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정말 살아계십니다. 저는 요즘 그 살아계신 하느님이 너무나 실감이 되어서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있습니다. 그 살아계신 하느님께 포기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 포기란 없습니다. 항복하시고 내려놓으세요. 聖徒는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절대 이기실 수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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