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태생소경 치유 (요한 9.1-7)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6-23 ㅣ No.121365

 

 

공동변역성서 


 태생소경 치유

 

(요한 9.1-7)

1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2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4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실로암은 '파견된 자' 라는 뜻이다. )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 [4월 3일 사순 제4주일]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전장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오늘은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에 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1장부터 한 맥으로 쭉 이어지는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1장부터 줄곳 인간에 행위 율법적인 행위를 부정하고 기각하는 그 하느님 은혜를 주제로 하고 있죠 자 특히 7장부터 초막절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그 에피소드들과 말씀들은 율법에 행위로 자신들에 선민됨을 자랑하고 증명하려는 유다인들과 구원은 오직 참 생수이시며 참 빛이신 당신으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주님과의 대조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죠

 

6장부터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죠. 역시 유다인들의 3대 절기중에 하나인 과월절을 배경으로 한 6장에서 오병이어에 기적을 통해서 영생은 이 땅에 빵을 통하여 이 세상에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을 설명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티베리아 바다로 몰아 넣죠 예수님이 보내신 거에요. 그리고 약속에 땅은 자신들에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어가는 곳임을 설명해 주셨어요. 물위를 걷는 사건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가시죠?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던 곳이 어디에요 광야. 광야에서 티베리아 바다를 건너면 어디로 가는 거에요 가나안이죠. 그 티베리아 바다로 몰아넣으시고 이제 그들이 열심히 밤새 새벽까지 노를 젓는데 못들어가죠? 힘들어 죽어요 그런데도 계속 젓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오시죠 너희들에 힘으로는 그렇게 저주의 물속에 빠져 풍랑속에 홍수속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지만 물 위를 걷는 유일한 존재인 나를 영접하면, (그게 노아의 방주를 상징되었던 거잖아요) 살아나리라 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은혜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물 위를 걷는 사건이였어요

 

그리고는 7 장으로 넘어와서 이제 초막절을 배경으로 해서 유다인들에 율법준수와 그 절기지킴에 대한 잘못된 오해와 그 기대를 그 생수와 빛을 소재로 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죠 유다인들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붙고 또 성전안을 수 많은 촛불로 밝히고 또 성전밖에는 거대한 촛불로 밝히는 그런 의식을 행한다 그랬잖아요. 주님은 그들 종교행위에 등장하는 물과 그 빛을 예로 들어서 자신이 바로 율법과 성전제사의 원형이심을 밝히셨잖아요 그게 78장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7 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러니까 내가 생수고 내가 물이니까 엉뚱한 데 갇다가 자꾸 물 붓지 말고, 그런 종교행위 하지 말고 그런 것으로 너희가 구원에 도달할려고 하지 말고 나를 마셔라라고 이야기했잖아요 7장에서 생수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대 제사장들과 바리사이인들이 주님을 잡아 죽일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참생수이신 주님의 정체와 또 그 생수가 어떻게 죄인들을 구원해 내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주죠. 내가 생수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래놓고 이 이야기가 무슨 얘기인지 아니? 그러면서 하나에 에피소드를 붙여서 보여주는데 그게 간음한 여인에 사건인 거에요

그것이 8장 서두에 붙어 있는 그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는 민수기 5장의 내용을 알지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에피소드라 그랬죠 그 간음한 여인의 죄를 밝히기 위해 물과 티끌을 섞어서 여인에게 마시우게 하는 그 이야기요 그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생수이신 주님이 저주받은 티끌과 연합이 되어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십자가 복음이 그 속에서 힌티되는 거라고 설명해 드렸잖아요 그러나 택한 자들만이 그 티끌 섞인 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이 하늘의 것 하늘에 생수이신 분이 티끌인 인간에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게 섞이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걸 마시면 몸이 부어서 터져 죽어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이야기 그것이 민수기 5장의 이야기잖아요 그렇게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에서도 이제 내가 물이다 내가 생수다 그러니까 나에게 와서 마셔라 라고 말씀하신 그 생수이신 주님이 죄로 인해 저주 속에 던져진 그 흙과 이겨져서 죄인들에게 제시되는 거잖아요 생수이신 예수님이 흙에다가 쓰셨단 말입니다 흙과 예수가 섞여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랬을때 그렇게 제시가 되었을 때에 자신들에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들은 어떻게 했어요 그 은혜의 복음을 피해 다 도망가 버렸잖아요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부다 도망가 버렸어요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오갈데 없는 자 나는 죄인이에요 라고 스스로 자각하고 인정하는 그 여인 간음한 여인만 갈데가 없으니까 그 복음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 물을 마시는 거에요 예수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8장 서두에 삽입이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구요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바로 다음에 나는 세상에 빛이다라고 또 초막절에 등장하는 하나에 소재를 또 등장시키죠 내가 촛불이야 내가 세상에 빛이다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에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812절에서 딱 선언해 버리시죠 그 선언은 자신들에 종교행위로 빛을 밝히려고 하는 빛에 도달하려고 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주님에 일갈이였죠 내가 빛이야 그러자 또 유다인들이돌을 들어 죽이려고 했죠 그래서 주님이 숨어서 성전에서 빠져 나오는 것으로 8장이 끝나는 거에요

 

그러면 자 7장에서 내가 생수야 나를 마셔라 라고 이야기 해놓고 이 생수에 이야기 생수이신 예수님과 그 생수이신 예수님에 역할이 어떻게 죄인들에게 주어지게 되는가를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로 설명해 줬잖아요 그러면 이제 내가 빛이다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 빛이 어떻게 소경에 눈을 뜨게 하는 가 죄인들에 눈을 뜨게 하는가에 대한 또다른 그림이 바로 오늘 본문에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7장에 이야기에 대한 그림이 8장 서두에 붙어 있고 8장에 이야기 내가 빛이다라는 이야기에 대한 그림이 9장 서두에 붙어 있는 거에요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은 아주 쉽게 이해가 가시겠죠 그 문맥을 놓치지 마시고 잘 연결해 보세요 오늘 본문인 9장 서두에 날때부터 소경된 자의 이야기는 생수이신 주님을 설명하는 그 8장 서두에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8장에서 선포된 빛이신 주님에 정체를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그 주님에 이야기를 단순히 질병에 치유나 아 주님은 소경도 고치시더라 모든 질병을 주님은 고쳐주시는 주님 이렇게 혹은 기적에 측면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소경인 죄인들에게 빛을 비추어서 그들에 눈을 뜨게 하시는 하나님에 구속사적 관점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대부분 다 그 이야기인 거에요 그 질병들이 다 뭐였죠? 죄의 증상인 죽음에 증상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질병들이 죽음에 증상인 질병들이 예수에 의하여 정복되더라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질병에 치유이지 예수님은 무조건 이 세상에 질병을 고쳐주시러 왔다라고 이야기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고쳐주고 가셨어야지 왜 몇명만 고쳐주고 가세요 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에 눈을 뜨게 하는 그 빛은 5절에 나오죠 내가 빛이다라고 또 이야기하시잖아요 오늘 본문에서도 창세기 1장에 그 빛에서 부터 이어져 오는 거에요

 

창세기 13절에 그 빛 첫째날 만들어진 빛과 창세기 116절에 그 태양이라는 발광체에서 나온 빛 그 빛은 다른 빛이에요 3절에 빛은 히브리어 오르 이고 16절에 빛은 메우라 란 단어에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3절에 그 빛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상징되는 창조에 하느님에 사역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시겠다 만들어 내시겠다라는 그 포효 그것을 빛이라고 하는 거에요.

 

태앙 빛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많아요 아니 대부분을 못봐요 우리가 듣는 것도 가청 주파수도 요만큼 밖에 안되니까 듣는 것도 우리는 미세한 소리도 못듣고 큰 소리도 못듣잖아요 그러니까 지구가 돌아가는 이 소리 우리가 안들리죠 그런데 소리 있단 말입니다. 그거처럼 그렇게 진짜 존재하는 빛도 안보이는데 우리가 그 하느님이라는 빛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하느님 빛 그것이 무엇인가는 성경 속에서 그 빛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한번 맛을 보고 가자 말이에요. 창세기 13절에 그 빛을 시작으로 어떻게 흑암에 낮이 생기죠 그리고 혼돈에 질서가 생기잖아요 틀이 생겨 하늘과 바다가 구별이 되고 물고 붙이 구별이 되고 이렇게 틀이 생기잖아요 틀이 생기고 넷째날 다섯째날 여섯째 날에 그 틀에다가 이렇게 채워지잖아요 그러니까 혼돈이 질서로 잡히고 공허가 플리스 충만으로 채워지는거 그게 창조지 않습니까 고렇게 새롭게 창조가 되죠 그리고 빛은 요한복음 1장 서두에서 이제 좀더 자세하게 설명이 되요 그 빛이 바로 이 빛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을 이해한 사람은 창세기 13절에 그 빛이 도대체 무슨 빛이냐를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사실 요한복음을 모르고 창세기 1장만 읽으면 창세기 13절과 16절에 그 빛이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말입니다 아직 발광체가 넷째날 창조되는 발광체가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는 그 빛이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가 이 머리로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 안해도 된다 말입니다 요한복음 11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예수님이죠 그런데 창세기 13절에서는 무엇으로 부터 창조가 시작 되었어요? . 4절 보세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뭐래요 사람들에 빛이라 자 이제 연결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그 창조에 이야기는 바로 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속에 던져진 이 죄인들에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적인 창조일 뿐인 거란 말입니다

 

그 첫번째 창조가 목적이 아니였던 거에요 그러니까 그 첫째날에 그 빛은 그게 도대체 뭘까라고 궁금해 할 필요가 없는 거죠. ,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롭게 창조되는 바로 그 구원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바로 그 빛이구나를 알면 되는 거에요. 그게 무엇이다라고 정확하게 이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어도 그걸 이해만 하고 계시면 되는 거에요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연결해서 이해만 하시면 전혀 궁금한게 없죠

 

그렇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빛 바로 그 창조에 빛이신 성자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말미암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상태인 날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생명과 광명으로 새롭게 창조해내시는 사건이 바로 구원에 사건이 바로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흑암속에 빠져있는 죄인들을 광명으로 인도하시는 참 빛에 대한 다른말로 새창조에 대한 그 예언은 이사야서에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창세기, 이사야, 요한복음을 이렇게 연결하면 더 이해가 쉽다 말입니다 한번 볼까요 91절 보세요

1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2 당신께서 주시는 무한한 기쁨, 넘치는 즐거움이 곡식을 거둘 때의 즐거움 같고, 전리품을 나눌 때의 기쁨 같아 그들이 당신 앞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3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미디안을 쳐부수시던 날처럼, 꺾으실 것입니다. 4 마구 짓밟던 군화, 피투성이 된 군복은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5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6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7 주께서 야곱을 책망하시니 그 말씀이 이스라엘에 떨어지네.

 

자 이게 결론인 거에요 6절에 보면 흑암과 죽음에 갖힌 백성들을 건저 내시는 참 빛의 정체가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죠 그 빛에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고 오늘 그림은 이제 골고타의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흑암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에 그 광명으로의 초대 그것은 인간들에 공로나 자격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7 절에 오직 야훼의 열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죠 야훼의 열심으로만 이루어지는 죄인들에 구원 그 이야기 전체가 오늘 본문에 다 들어 있다구요

 

7장과 8장에서 참 생명수이시며 참 빛이신 주님은 오직 당신에 은혜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라고 가르치셨죠? 계속 가르치시는데 유다인들이 아니야 미친놈아 너는 미쳤다 귀신들렸다 그러죠. 예수님은 계속 객관적 진리, 복음을 선포하신다 말입니다 그런데 못알아 듣더라는 거에요 사람이. 그게 8장 마지막에 돌로 때려죽일려고 하더라로 끝나잖아요 예수님이 찾아가서 뚫고 들어가서 그 마음판에다가 그냥 새겨 버리셔요 그게 구원입니다 새창조 . 예수님을 돌로 때려 죽일려고 하는 자들에 대표, 그들을 상징하는 날때부터 소경인 자를 제발로 찾아가서 진흙 이겨서 눈에다 발라주고 가서 씻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로 안들으니까, 그게 새창조인 거에요 그게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죄인들에 구원이라는 건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절대 우리에 노력이라든지 우리에 지식이라든지 우리에 힘에 달려 있는게아니다 라는걸 7 8 9장만 잘 읽어봐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에요. 그렇게 하느님 손에 달려있는 구원의 주도권, 하느님께서 구원에 처음부터 시작이 되신다면 그 구원을 계획하셨을때 이미 밑그림을 다 그려 놓으셨겠죠? 우리에게는 전혀 어떤 열심이라든지 뭐 자격이라든지 이걸 찾을 수 없는게, 구원이니까. 아무리 복음을 올바로 설명해줘도 돌로 때려 죽일려고 하는게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키겠다고 계획하셨을때 그 전체 밑그림을 그리셨을거 아니에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豫定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정이라는 건 인간에 구원에 주도권 주권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완성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느님에게 있다. 이것만 확인이 되면 예정은 당연한 거죠. 하다못해 개집을 하나 짓더라도 우리 이렇게 밑그림 그리잖아요 요건 지붕 요건 앞문 뒷문 그거 안그리면 뒷문을 앞에다 갖다 붙이고 앞문을 뒤에다 갖다 붙이고 형편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린다 말입니다. 개집을 지을때도 밑그림을 그리는데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겠다고 계획하셨을때 그 밑그림을 안그리셨겠냐구요 그렸단 말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들이 들어가야 할 거 까지도 정해 놓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전에 우리에 이름이 불렸고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라고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거에요 그걸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냥 내가 조금 있다가 이 물을 한잔 마실 것이다 이것까지 하느님이 다 정해놨다 이거는 숙명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거를 예정이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이 목마르면 먹는거고 목 안마르면 안먹는거지 무슨 예정을 자꾸 그런데다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정은 항상 영망적 관점에서의 예정인 거에요 내가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면서 살 수 있었지 라고 딱 돌아보니까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끌고 오셨구나 요 자리로 옮기려고 그런 많은 사건들을 이렇게 허락하셨구나 그리고 그것들을 선용하여 나를 이렇게 이끌어 오셨구나를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지 절대 무슨 뭐 숙명론 적으로 그런것을 이해하거나 그러시면 안됩니다

 

자 사람은 그렇게 하느님을 좌절시킬 수 없어요 하느님을 향한 사람에 미움과 죄 까지도 하느님을 좌절시킬 수 없다라는 것을 78장과 9장 서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7 8 9장만 잘 공부해 놓으시면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를 전부 아주 좀 명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은 하느님이 시작하셔서 하느님이 완성하시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느님에 열심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거룩을 향한 감사에 열심을 부리게 됩니다 아니 하느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내세요. 구원받을 때 부터 예수님과 그 하느님에 백성을 연합시켜서 구원해 냈기 때문에 그들의 삶 또한 예수님의 삶과 연합시킨 십자가에 삶으로 끌고 가버리세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삶의 원리이며 규범인 거에요 십자가의 삶은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지금 하느님의 통치에 승복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사는 그들이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되요

 

이 땅에서 그런데 그 삶이 뭐라구요 십자가의 삶이라니깐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규범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반드시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야 되요 지금 당장 완벽하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자꾸 낮아지고 섬겨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십자가 내가 손해보고 조금 상한다 할지라도 하느님과 나에 이웃에 유익을 위해 내가 나를 비워 내는 그런 삶이 우리에 삶에서 나오게끔 하느님이 만들어 내신다니깐요

 

그거는 가난하게 살아라 높은데 올라가지 말아라 이런 차원에 이야기가 아니라니깐요 부자이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도 얼마든지 그 십자가에 삶을 살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치하게 그런거는 우리가 따지지 말자 말이에요 이왕이면 부자되고 이왕이면 높은데 올라가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올라가도 십자가의 삶을 넉넉하게 살아낼 수 있는 실력을 먼저 키우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제 말은 그게 안그러고 그냥 거기에 올라가 버리면 큰일나는거에요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는가 잘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한 성공 그것이 바로 너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자녀로서 실력이 갖추어진 자가 높은 데 올라가서 성공했다면 그것은 그에게 유익이 될 수 있지만 그냥 자기에 힘과 노력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고지 꼭데기에 올라가가지고 거기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겠다 그게 너를 망하게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대니깐요 그러니까 제 말을 잘 세겨 들으세요 제가 부자되지 말라는거 아니에요 제발 부자들 되셔서 헌금좀 많이 하세요 제발 높은데 올라가서 저도 좀 어디가서 자랑좀 하게 해주세요 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세요 하지만 신앙의 실력을 먼저 키운 다음에 그것은 부차적으로 추구하는 거에요 하느님이 알아서 붙여 주시는 거에요 그거는요 그러니까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지 그게 나쁘다는 거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어떻게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한 그 구원에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 한번 구체적으로 보자구요 먼저 1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자 소경이 먼저 주님을 본게 아니라 주님이 먼저 소경을 보셨죠? 소경은 볼 수가 없으니까 ㅎㅎㅎ   여기에서 보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이돈은 알다 라는 뜻이에요 원래 알다라는 뜻과 같이 써요 그래서 종종 그 단어를 알다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연하게 지나가다가 불쌍한 소경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셨으며 알고 있는 그를 찾아갔다라는 의미에서 에이돈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소경은 주님이 오신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어요 그는 주님이 누군지도 몰랐고 주님이 어떤 능력을 가진 분인지도 몰랐어요 따라서 그는 주님께 눈을 뜨게 해달라는 부탁도 할 수 없었어요 그게 바로 구원받기 전에 우리에 상태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가 자격을 갖춰 구원에 이르겠다라는 그게 말이되나요? 그래서 성경에서 소경을 죄인들을 총칭하여 상징하는 단어로 자주 쓰는 거에요 그리고 복음서에는 주님에 많은 치유사건중에 유독 소경이 고침받은 사건을 특별하게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치유사건은 귀먹은 벙어리 고친 사건이 하나. 중풍환자 고친거 하나. 열병 앓던 자 고친거 하나. 그리고 문둥병 고친거 둘. 또 다시 살려낸 사건 셋. 반면에 소경 고친거 다섯. 압도적으로 많죠? 그것은 성경이 소경에 상태를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죄인들에 상태라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줌으로 해서 주님은 그런 영적 어두움에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광명의 빛으로 인도해 내시는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거에요.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속에서 갈길 몰라 해매며 살고 있던 그 성전문앞에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같은 존재였더라는 것을 예수님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죄 속에 빠져서 거지같은 인생을 거지같은 삶을 살다가 거지같이 죽어야 되는데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은 전부 거지같은 삶이니깐요. 그게 죽어야 하는데 그 삶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에서 기인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어머니 배속에서 태어날때부터 죄인이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중도 실명자가 아닌 날때부터 소경인 자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너희들에 실존이였다 그래서 날때부터 소경된 자 날때부터 죄인이였던 우리를 어떻게 고치실 것인가를 보여줄려고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택하신 거에요 주님은 그 눈을 값없이 치료해 주심으로 해서 당신에 하실 일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세요 주님이 소경을 찾아가셨을때 주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어요 본문 2절로 갑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당시 유다인들은 모든 고난과 불행과 그 질병을 죄에 결과로 이해를 했어요 물론 그런 것들이 죄의 결과 인간들에게 찾아온 그 죽음에 증상들인 것은 사실이에요 아름답게 창조된 하느님에 피조세계에 고난과 불행과 질병이 찾아온 것에 그 근원적인 뿌리를 찾아가 올라가 보면 어디에요 아담에 죄잖아요 그러니까 죄로 부터 온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우리가 당하고 있는 그 불행 고난 질병이 바로 당사자에 죄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착각이란 말입니다 고건 오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러면 욥은 뭐에요 하느님은 욥을 의로운 자라고 전제하신 후에 그에게 고난과 질병을 막 던져주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고난과 질병으로 오는 것은 아닌 거에요 그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에 철학과 신학에 이교사상이 상당히 많이 침투해 있음을 보여주는 거에요 예수님 당시에 바벨로니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주장된 것이 환생에 교리였어요 윤회 범신론이 그렇게 서구에도 이미 들어가 있었단 말입니다 환생의 교리, 윤회 그들은 일종의 윤회체계의 범주속에서 고난의 문제를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전생의 죄를 많이 진 사람이 이생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질병을 얻게 된다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 사상은 유다인들에게 조차 아주 편만하게 일반화되어 있었어요 무서운 거에요 그러니까 영지주의에 영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여러분 모릅니다 오늘날 까지도 있죠 그래서 그러한 환생 교리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에 고통과 불행과 질병을 전부 전생에 죄로 돌려요 물론 유다인들에 선생인 랍비들은 그 이론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어요 많은 유다인들이 거기에 넘어갔지만 랍비들은 그 이론을 지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랍비들에 주장도 옳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04-5절에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라는 그 구절을 근거로 해서 죄의 유전으로 고통의 문제를 이해했어요 그 아비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 죄가 나에게 전가가 되어 유전이 되어 나에게 질병과 고난으로 내려오게 된다라고 이해를 했다구요 거기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그런 주장이 나온 거죠 말도 안되는 거에요 여러분 그런 책은 집에 있으면 빨리 갖다가 찢어 버리세요 그래서 이 제자들이 그가 소경이 된게 그 사람에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에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물어본 거에요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태아가 어머니에 뱃속에서도 죄를 지을 수 있다라고 생각했어요 성경을 근거로 한거에요 창세기 2522절 보실까요

22 뱃속에 든 두 아이가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와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야훼께 까닭을 물으러 나갔다. 23 야훼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거기서 죄 지은 놈들은 날때 병얻어서 나온다 이렇게 이해했다니깐요 시편 583절 보세요

3 모태에서부터 잘못된 자들, 나면서부터 빗나가서 거짓말만 하는 자들, 4 독사같이 독이 서리고, 살무사처럼 제 귀를 틀어 막고는 5 솜씨 좋은 마술사의 소리도, 홀리는 요술사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요 악인은 모태에서 부터 멀어졌다 거기서 죄를 지었다는 거에요 이러한 이해 그러니까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해서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죄를 지으면 장애를 갖고 불행을 갖고 이렇게 태어난다라고 이렇게 믿기도 했어요 이렇게 환생에 교리나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이론이나 모태속에서 지은 죄에 결과에 의한 그런 질병등에 이론은 참 더무니 없는 이론인 거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서 이게 누구에 죄에 결과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어본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단호하게 대답해 주시죠 3절 보세요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하느님은 자기가 하는 일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장애를 갖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을 장애를 막 주어서 내보낸다는 이야기입니까? 자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성경에 원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아주 엉뚱한 번역을 해 놓았어요

 

그러면 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하시는 일이라는게 뭘까요 지금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택하셔서 그 소경을 통해 하느님에 하시는 일을 지금 나타내겠다라고 하시는데 그 소경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하느님 일이 뭐겠냐 말이에요 우리가 좀전에 이사야서 9장에서 읽었던 그 흑암과 죽음에 처한 당신에 백성들을 건져 내서 광명으로 빛으로 인도해 내는거 그게 하느님에 일이잖아요 구원, 우리 죄인들에 구원. 하느님 백성들에 구원. 그러니까 이 날때부터 소경된 자에 이야기는 바로 구원에 이야기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94절 보세요 4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 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조금더 명확해 져요 여기서 또 번역이 조금 잘못된 부분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사실 아이 머스트 워크 란 뜻이에요 '내가' 라는 거지 우리가 아닙니다 단수에요 그러니까 제대로된 번역은 '나를 보내신 이에 일을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뜻이에요 요한복음 33절 보세요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볼 수 없음과 거듭나지 안니함을 동격으로 이렇게 올려놓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이야기는 뭐에요 볼 수 없음 소경을 통해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거듭남을 설명해 주는 거에요 자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는지 한번 볼까요 소경을 어떻게 고치는지 보면 알겠죠 96절 보세요 6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주님께서는 소경뿐만이 아니라 많은 각양각색의 병자들을 고치셨죠? 그러나 오늘 본문처럼 지저분하게 흙에다가 침 뱉여 갖고 그걸로 이렇게 진흙 이겨서 눈에다 발른 적은 한번도 없어요. 죽은 사람도 심지어 죽은 사람도 나와라 하니까 나왔다니깐요 문둥병자들 보고 깨끗해져라 하니까 깨끗해 졌다구요 심지어 어떤 여인은 예수님이 아무말도 안했는데 옷만 만졌더니 혈루병이 나아 버렸어요

 

그런데 왜 오늘에 이야기에서면 지저분하게 침으로 진흙을 이렇게 개서 눈에다 다 발라주고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또 가서 귀찮게 가서 씼으라고 왜요 하느님에 하시는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해. 앞에 답이 나왔었잖아요 우리가 전에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성경에서에 그 흙 그 티끌은 저주받은 죄인들과 그들에 죄를 총칭하는 소재였어요 창세기 27절 볼까요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이 흙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창세기 314절 보세요

14 야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땅이 저주를 받았어요 흙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아담이 범죄후에 흙은 저주받은 인간에 현실과 결국을 가리키는 소재로 등장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간음한 여인에 이야기에서 처럼 자신과 흙을 섞어서 개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에 침이 나와서 이 저주받은 흙과 섞여 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하늘에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저주받은 육신 안으로 들어와 버리시는 거에요. 예수님의 성육신 인카네이션을 이야기하는 거죠 주님의 인카네이션은 육신을 입으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로도 우리 죄인들에 구원에 방법을 담고 있어요

 

어떻게 하느님이신 그분이 죄인과 연합함으로 하느님이 죄인에게 전가되고 이 죄인에 실상이 하느님에게 전가되어져 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이 하느님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고 하느님이신 그 예수님 인카네이션한 예수님에 몸 안에 이미 구원에 방법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늘의 것 침과 흙이 개어져서 예수가 죽어야할 소경에 환부인 눈에 붙여지는 것입니다 치료받아야할 부분에 붙여지고 예수님이 실로암 못가에 가서 물속에 빠져 죽으시는 것입니다 딲여져 내려가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 고쳐져야할 환부가 낫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죠.

 

하늘의 주인이신 성자 하느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 죄인들과 개어지셨단 말입니다 그들에 죽음을 품어 안아 버리시고 예수님이 물에 빠져 죽어버린 것입니다 홍수에 빠져 죽어버린 거에요 그리고 그 죽음을 품고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들이 눈을 번쩍 뜨게 된 것입니다 구원을 받게 된 거에요 그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그대로 그려져 있는 거에요. 날때부터 소경된 자에 이야기가 내가 세상에 빛이다라는 그런 선언뒤에 이렇게 붙여 있는지는 이제 이해가 가시죠 ? 그것만 이해가 가셨으면 됐어요 그런데 잘 보시면요 8장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그 일과 9장에 그 소경에게 일어난 일이 정확하게 같아요 8장에서는요 하느님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가 세상에 빛임을 유다인들에게 이야기하자 유다인들이 득달같이 주님을 거짓말 쟁이로 몰아붙이죠 볼까요 812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3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증언하고 있으니 그것은 참된 증언이 못 됩니다' 하며 대들었다.

 

9장에서는 눈을 뜨게 된 소경이 거짓말로 몰려요 빛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 소경도 거짓말 쟁이로 몰립니다 18 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본래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유다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아울러 8장에서는 주님께서 당신에 대한 아버지에 증거하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유다인들이 아버지의 증거를 알아듣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볼까요 818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1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당신 아버지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뿐더러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만일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9장에서는 어때요 소경의 부모가 아들에 대해 증거하죠 그런데 유다인들이 안받아 들여요 91818 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본래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19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20 그의 부모는 ',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부모에 증언이 나오죠 또 여기에 뿐만 아니라 8장에서는 주님에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돌로쳐서 죽일려고 하고 9장에서는 그 소경의 말을 들은 유다인들이 그를 쫓아 내버리죠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신을 가리켜서 보내심을 받은자라고 8장에서 이야기하세요 816절 보세요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율법에도 두 사람이 증언하면 그 증언은 참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18 내가 바로 나 자신을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증언해 주신다.'

 

날때부터 소경된 자는 어때요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요 볼까요 7절 보세요 7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실로암은 '파견된 자' 라는 뜻이다. )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아주 흡사한 구조로 8장과 9장이 대조가 되고 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서 에고 에이미 라고 칭하시는데 그거는 하나님에 것에 쓰인 단어거든요 9장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그다' 에고 에이미라는 단어를 씁니다 볼까요 858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이게 에고 에이미 내가 하느님이라는 뜻이란 말이죠 여기에서내가 있느니라 에고 에이미에요 98절 볼까요 8 그의 이웃들과 그가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9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 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에고 에이미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어요 요한은 지금 8장과 9장에서 의도적으로 이같은 단어들과 내용들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을 묘사하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육신에 몸을 입으시고 다른 말로 더러운 티끌과 이겨지셔서 죄인에 환부에 붙여지시고 가장 비천한 죄인의 모습이 되셔서 실로암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아요

 

그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십자가에 삶을, 주님께 보내심을 받은 소경이 그대로 판박이 처럼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날때부터 소경인 자가 이제 그 눈에 진흙을 이겨 붙임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안보이는데 거기다가 진흙까지 덕지덕지 붙여놨으니 더 안보이죠? 그리고 그것은 나는 소경입니다 하고 광고를 하는 낮아진 모습으로 서는 거에요 그 상태로 실로암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에 명령을 받은 그 목적지로 소경이 가는 거에요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라는 자기를 보내신 분에 명령을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함인 거죠 그 목적지까지 가면서 그 진흙을 눈에 이겨 바른 그 소경은 온갓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거에요 그리고는 실로암 연못에 도달하죠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키드론 골짜기에 그 기혼샘에서 흐르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여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성전에서 그 물을 떠다 썼잖아요 초막절에도 갖다 붓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실로암 물은 기혼샘에 가장 낮은 곳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하는 거에요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를리는 없잖아요 그 가장 낮은 곳에 조롱과 멸시에 모습으로 내려가서 그 자기를 보내신 이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조롱과 멸시를 감수하고 내려가서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하여 무릎을 꿇고 눈을 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이라는건 예수의 삶이 그랬다구요 하늘 보좌를 차지하셔도 아깝지 않은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가지고 이 세상에 죄악들과 이겨지셨어요 그리고 갖은 수난과 멸시를 받으시고 그러한 조롱과 멸시 속에서 하느님에 명령을 이루겠다고, 내가 너에게 준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말아라라는 하느님에 명령을 이루겠다고 십자가까지 내려가신 거에요 내려가서서 거기서 무릅을 끓고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삶이 소경의 삶에 그대로 전가되고 있다라는 것을 8장과 9장에 그런 단어들과 상황들을 통해서 요한이 일부러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어디로 보내요 실로암 못으로 우리를 보내는 것입니다. 구원에 완성 지점으로 우리를 보내시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에는 온갓 조롱과 멸시와 억지와 천대와 이런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하느님을 니 목숨처럼 사랑하라 라는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실로암 못으로 낮은 곳으로 한발 한발 걸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에 삶인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에 삶 그것을 우리는 자기 부인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시편 1165절 볼까요

5 야훼께서는 너그럽고 의로우신 분, 우리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이거 다윗이 쓴거에요 야훼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전하시나니 내가 낫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재물과 권세를 한 손에 줬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행복하지 않았어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범죄를 짓죠 밧세바를 범하고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자기에 욕정을 채울 수 있었는데 그걸로 안채워지니까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기에 만족을 채울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힘으로도 행복과 만족에 도달할 수 없어 그런데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가 무릅을 딱 꿇었더니 주님이 거기서 나를 구원하시더라. 그때에 비로소 참 행복에 내가 도달할 수 있겠더라 라는 것을 다윗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낮은 자리에 섰을때 우리는 하느님에 구원을 경험하고 그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거에요.

 

여러분 세상에 힘을 쫓아 갈때는 그것에 눈이 팔려 절대 하늘의 것으로 기쁘고 만족한 삶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에 표지는 뭐에요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낮아짐이에요 낮아짐 자꾸 나를 자랑하고 유명해지고 높아질려고 하는 그런 시도가 아니라 낮아짐. 돈을 많이 벌고 못벌고 유명해지고 안유명해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아니고 이거 문제가 아니라 낮아짐. 돈이 많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보잘것 없는 나를 이렇게 전심으로 섬겨줄때 참 우리 행복해 지지 않아요 낮아짐입니다

 

뭐 개뿔도 가진게 없는 사람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에 그냥 진흙을 이겨 발른거 처럼 그런 부끄러워한 모습으로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열심히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줄때 우리는 감동받지 않습니까 그게 낮아지는 것입니다.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황속에서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에 삶 섬김에 삶 사랑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그거에요 때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눈에 자꾸 그냥 침을 퇴퇴 뱉어 갖고 진흙을 이렇게 이겨 붙이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경험을 할 때가 있을 거에요. 아 드럽게 이걸 왜 자꾸 붙이시고 그래가 아니라 그 상황속에서 나는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느님이 명령하신 니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좀 사랑해 달라는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그 상황에서 보여주는 거에요

 

덕지덕지 붙이고 그러나 마지막에 그거 다 닦아 주신다니깐요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이미 그거 다 품어 안으시고 여러분의 고통 질병 불행 다 품어 안으시고 이미 다 불살라 버리셨다구요 그리고 나중에는 인제 그게 가시적으로 나타날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잠시 부끄러움 당하는거 뭐 어때요 괸찮아요 잘 참으세요 잘 참으시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그 낮아짐에 삶을 잘 살아 내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100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