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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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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4주일. 2018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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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8-09-14 ㅣ No.123441

 

연중 제24주일. 2018916.

마르 8,27-3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 질문을 하십니다첫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이 질문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답합니다이 답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사람들이 그분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반영합니다. 두 번째의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베드로가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呼稱)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이 그분에 대해 사용하던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복음서들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전기(傳記)와 같이 기록되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고증(考證)된 사실만을 보도하는 현대의 전기가 아니고,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에 대한 초기 제자들의 믿음이 가미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당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당신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배척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초기신앙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은 것은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의 일이었습니다오늘 복음이 베드로의 고백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금명(禁命)을 전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강대국(强大國)으로 만들어주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인물입니다. 예수는 그런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였다고 말합니다그렇게 배척당하고 무력하게 죽는 메시아는 있을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정서가 반영된 베도로의 말입니다.복음서는 예수님의 격한 반응을 소개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가미되어 있습니다그 죽음을 하나의 패배(敗北)로만 보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복음서들이 전하는 수난사(受難史)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놓고, 유대교 대사제와 율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을 터인데.”(마르 15,32).  그들은 실패자로 죽어가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승리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인물은 하느님과 관련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말입니다그것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이것이 초기 신앙인들이 깨달았던 바이고, 또한 그들이 실천한 바입니다. 십자가로 끝난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복음(福音), 곧 기쁜 소식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초기 신앙인들이 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 상()을 근본적으로 수정(修正)합니다.  유대인들이 상상하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는 영광스런 인물이었습니다오늘 복음은 그것은 사람들이 받는 유혹이라 지적합니다. 인류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자기 욕망의 성취를 항상 꿈꾸었습니다. 인간을 성공시켜주고,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주는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인류는 비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빌고병들었을 때는 신에게 빌어서 병을 고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전혀 다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하느님을 이용하여 내가 잘되겠다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배워서 그분의 일을 실천하겠다는 신앙입니다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자녀는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생명을 삽니다아버지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였으면, 그 자녀도 자비와 사랑을 배워 실천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장하여 상상한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인간은 높은 사람이 정한 법을 지키고높은 사람에게 정성을 바쳐야 잘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베드로를 비난하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이 세상의 강자(强者)로 군림해야 한다는 베드로의 생각을 예수님이 극단적으로 거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그분의 죽음을 중심으로 발생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열어주는 존재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의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이 말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질서의 세계, 곧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소모하는 질서의 세계입니다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세계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강자(强者)도 아니고, 높은 분도 아닙니다예수님 안에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일은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고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 자비롭고 사랑하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사람들이 상상하듯이하느님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심판하고, 벌주는 분이 아닙니다지켜보고 심판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사람들, 곧 높고 강하다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1요한 4,10) 그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신약성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시작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행위입니다우리는 사랑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한 그만큼 상대방이 응답하여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합니다그리고 우리는 즉시 사랑을 취소합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대가(對價)없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대가없이 베풀고 사랑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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