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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 (요한10:1-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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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5-13 ㅣ No.129658

 

 

 

 

공동번역성서
 

 

 착한 목자  

 

(요한10:1-5,11-15)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2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 간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 하나 불러 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양떼를 불러 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 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 간다. 5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본문에 나타난 착한목자의 특징을 통해 양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목자, 그 분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시며(각각 이름을 부르다) 항상 우리 앞서 가시면서(인도하여 가다) 우리의 모든 죄와 어두움, 심지어 우리의 죽음까지도 다 삼켜 버리시는 참 목자이십니다.(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 하셔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삼켜버리시고 당신의 죽음을 자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착한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착한목자의 삶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단의 제물이 되어 죽는 흠 없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착한목자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고 요한묵시록은 성도인 양들을 가리켜 ‘어린양이 어디 로 이끌던지 군소리 없이 좇아가는 양들’ 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은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이끌고 가십니다. 목자이신 어린양은 자신이 이끄는 양들을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양들로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곳으로 이끌고 가시지요.  그렇게 우리는 먼저 앞서서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前進하는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을 좇아가며  그 앞선 어린양의 모습으로 회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95:6-7) 6 어서 와 허리 굽혀 경배드리자. 우리를 지으신 야훼께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 이끄시는 양떼. 오늘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듣게 되리니 

우리의 착한목자는 양들이 야훼앞에 무릎을 꿇고 온전히 복종을 하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착한목자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양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는 착한목자의 모습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어 힌트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착한목자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성경은 온통 착한목자이신 예수님에 관 한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목자가 누구입니까? 형에게 맞아죽은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입니다.

 (창세4:2) 2 하와는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인류 최초의 목자 아벨은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느님께 봉헌된 자였습니다. 

 (창세4:4) 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여기보시면 하느님은 아벨 자신과 아벨의 제물, 즉 그의 삶 전체를 悅納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목자인 아벨과 그의 삶을 기뻐 받으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던 죄 없는 자가 세상을 상징하는, 힘을 소유한 카인에게 맞아 죽어 피를 뿌림으로 그 자신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였던 아벨 자신이 제물이 되어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창세4:10) 10 그러나 야훼께서는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고 하시면서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짓고있다. 
여기에서 ‘울부짓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짜아크’는 ‘호소하다.부르짖다, 예배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예요.  그러니까 아벨은 살아서도 하느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하느님께 복종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와 짝이 되는 신약 성경 한 구절을 찾는 다면 어느 곳이겠습니까?

(필립2:8)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착한목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敎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인 아벨이 죽고 그 대신 죽음에 의해 이 땅에 탄생한 사람은  셋입니다. 그의 이름의 의미를 잘 보세요. 

 (창세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한 자리에 들었더니 아내가 아들을 낳고는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 이제 또 다른 아들(씨)을 주셨구나.' 하며 이름을 셋이라고 지어 주었다. 


목자인 아벨의 피 값으로 대신 태어난 사람이 셋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셋에게 ‘씨’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창세기에서  그 ‘씨’ ‘제라’라는 단어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 안에서 연합되어 탄생하게 되는 교회에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이야기는 목자인 그가 제물이 되어 죽음으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새로운 씨가 탄생하게 되는 요한복음 10장의 선한목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죽었지만 지금도 그가 믿음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11:4) 4 아벨은 믿음으로 카인의 것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와 예물을 받으시고 하느님께서 그를 의로운 자라 하셨답니다.  그건 단지 양을 잡아 드린 아벨의 제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양을 잡아  하느님 앞에 제물로 드렸던 아벨의 제사가 바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하느님께 복종했던 예수의 제사처럼 그러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의 죽음이 하느님 앞에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거기에 ‘義’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동물 제사로는 하느님과 인간간의 관계가 義 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브10: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만 ‘義’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로, 아벨과 하느님 사이가 ‘의’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이야기를 아벨의 삶이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 믿음을 매개로 하여 지금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 그 구절을 보면 마지막 후미 부분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받고 있는 ‘아우테스’ 라는 대명사 앞에 ‘디’ 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 다. 그 단어는 ‘~을 통하여, ~을 매개로 하여’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 여 아벨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양을 치는 목자로서 예수님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 창세기 야곱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상속자로서 인정될 수 있는 안락한 집을 떠나 열심히 일을 하여 그 대가로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선한목자의 모습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고 배신과 모함을 격으며 라헬과 레아 두 아내를 얻습니다. 그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순서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번째 신부로 지목하시고 그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3:1-2) 1 그러면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2 과연 여러모로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로마9:4~5)  4 나의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참된 예배가 있고 하느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5 그들은 저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들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영원토록 찬양합시다. 

이스라엘은 구속사 안에서 하느님의 첫사랑 역할을 하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남편이 되시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하셨음에도 불구 하고 첫 번째 사랑을 얻지 못하죠. 물론 이것은 구속사의 순서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하느님이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기로 하셨는데 실패하셔서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모델로 삼으셔서 인간들은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자격과 조건과 노력과 열심으로도 하느 님과 화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마디로 죄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오로지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순서적으로 표현을 한 것일 뿐입니다.


  (예레31:32)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하느님은 이렇게 상징적 첫사랑이었던 이스라엘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첫 아내로 첫 사랑 라헬을 얻지 못하였고 첫 번째 아내로 이방인을 상징하는 레아를 얻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순서는 하느님의 계획속에 이미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 다.  신명기에 가보면 모세가 그 순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신명32:21) 21 신 아닌 것을 모시어 내 질투심을 터뜨리고 허수아비를 섬겨 내 속을 썩여 주었으니, 나 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돌봐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질투를 하게 하고 무지한 민족을 돌봐 주어 그들의 속을 썩여 주리라. 
 
이 모세의 말을 바오로가 로마서에다가 인용해다 씁니다.

  (로마10:19~21) 19 나는 다시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까? 우선 모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하여금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기하게 하겠고 어리석은 백성을 보고 화나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20 또 이사야는 더욱 대담하게,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고 하였습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지금 敎會에게, 이스라엘이 먼저 선택되어졌다가 그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림으로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그러한 순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측에서의 어떤 노력이나  열심으로도 주어질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순서를 택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유다교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이스라엘이 샘이나는 때가 올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유다교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 날 것입니다. 창세전에 택해진 하느님의 백성들이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그렇게 시대마다 분산되어 각자의 역할을 하며 구원으로 돌아오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양치기 야곱이 그의 삶속에서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선한목자가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보세요. 


(창세31:38~42) 38 지금까지 이십 년이나 저는 장인과 함께 살아 왔습니다. 그 동안 장인의 암양과 암염소 가운데 한 마리라도 유산한 일이 있었습니까? 저는 장인의 양떼 가운데 수양 한 마리도 잡아 먹은 적이 없습니다.  39 양이 맹수에게 물려 죽어도 그것을 장인께 가져가지 않고 제가 물어냈습니다.  또한 밤에 도둑을 맞았는지 낮에 도둑을 맞았는지 장인께서는 그것을 저한테 물리셨습니다. 40 저로 말하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했습니다. 41 저는 장인 댁에서 이십 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십사년은 장인의 딸들에게 장가를 들려고 장인의 일을 도와드렸고 육년은 장인의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장인은 저에게 주기로한 삯을 열번이나 바꿔치기하셨습니다.  42 만일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버지 이사악을 돌보시던 두려운 분이 제 편이 아니셨더라면, 장인은 저를 빈털터리로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얼마나 보람없는 고생을 했는지를 살피시고 어젯밤에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착한목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요?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양들을 보살피며 양들이 낙태하지 않도록 보살폈고 아무리 배고파도 삯군목자들처럼 양들을 잡아먹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목자인 야곱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지극 정성으로 잘 보살펴서 결국 신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도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보살피며 결국 어린양의 신부로 완성시켜 내는 것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러한 목자 야곱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요한17:12)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착한목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떻게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인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40:11) 11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게 바로 야곱의 그림에 나타난 착한목자이신 메시아의 모습인 것입니다.
야곱의 수고에 의해 값이 지불되고 산바된 신부와 양떼들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야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양의 우리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 밖으로 불려나와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좇아가는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 지 않으세요?
그 야곱의 모습은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신 그 목자를 좇아 십자가를 지고 역시 영문 밖으로 몰려 나가는 양들의 모습과 동일한 그림인 것입니다.

 

  (히브13:12~14)  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14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앞으로 올 도성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따라 나온 양들, 신부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시편45:10~11) 10 내 딸아, 들어라, 잘 보고 귀를 기울여라. 네 겨레와 아비의 집은 잊어 버려라. 11 너의 낭군, 너의 임금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리라. 그는 너의 주님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여라.  

여기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은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지 이 저주받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신부를 온갖 수고를 무릅쓰고 얻어내어 그 신부들이 오랫동안 정들어 살던 아비의 집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보세요. 하느님의 신부들은 절대 이 세상에 뿌리박고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태4:18~22) 1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 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21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22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 갔다.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데에 그들을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낚여 올려지면 그 물고기는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아 올려서 죽이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 낚아 올린다는 말의의미를 좀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 아모스서 4장2절입니다. 2 주 야훼께서 당신의 거룩하심을 걸고 맹세하신다. '너희를 갈고리로 끌어 내고 너희 자식들을 작살로 찍어 낼 날이 이르렀다. 
 이 아모스서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고리에 걸려 올라오는 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물속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저주와 죽음과  심판에 푹 젖어서 익숙하게 살던 자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올라와 심판 받아 죽는 것이  사람을 낚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으로 가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시는 그 에피소드 바로 아래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마르1:21~27) 21 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23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24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25 그래서 예수께서는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26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27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지금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 사건이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유다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그 속에 섞여 있는 귀신들린 자를 건져내십니다. 낚아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귀신들린 사람은 분명 한 사람인데 24절을 보시면 그 귀신들린  사람이 ‘우리’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귀신들린사람은 지금 자기와 함께 회당에서 예배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로 ‘우리’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은 회당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귀신들린자로 부름으로 해서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수 있다고 하는  유다주의에 빠진 모든 이들을 가리켜 ‘귀신들린 자’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의 대표가 ‘나자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요  우리를 멸하러 왔어요’ 하고 외칩니다. 여기서 상관이라는 단어는 전쟁 용어 입니다.

 (판관11:12) 12 입다는 암몬족 임금에게 사절을 보내어 말을 전했다. '나와 그대 사이에 무엇이 잘못됐다고 내 영토에 쳐들어 왔는가?' 
 그러니까 지금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 ‘왜 나를 공격하러 왔느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공격하여 심판하시러 그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귀신들린 자의 외침과 비슷한 대목이 구약 에 나옵니다. 

 (1열왕17:17~18) 17 이 일이 있은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눕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하여져서 마침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 여인이 엘리야를 추궁하였다. '오, 하느님의 사람이여! 어른께서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오시어 내 죄를 일깨워 주시고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시랩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하느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하고 외치지요? 하느님의 거룩이 죄인 앞에 서게 되면 그 죄를 공격하기 때문에 죄인들이 그 앞에서 ‘왜 나를 공격하느냐? 왜 내 죄를 생각나게 하느냐? 왜 내 아들을 공격하여 죽게 했느냐?’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 낚아 올리라 하신 것은 그들을 물속에서 꺼내어 심판하고 공격하여 죽여 버리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지요?


 복음이 죄인들에게 떨어지게 되면 그 즉시 그 자리에 죄가 폭로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경외의 외침이 나오게 되요. 그런데 그렇게 물속에서 나온 물고기에게 떨어질 저주와 심판이 주님에게로 떨어져 예수님이  죽고 물고기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백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고기는 이제 다시는 저주의 물과 심판의 홍수와는 아무 관계없는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며 그게 사람을 낚아 올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낚아 올리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귀신들린 자들 틈에서 낚아 올려져서 이제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어떤 한사람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귀신들린 자를 상관하셔서, 다른 말로 공격하셔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시고 그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그 유다교의 회당에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게 구원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유다주의라는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완전히 뽑아내시고 힘의 원리에 젖은 옛사람을 온전히  죽여 버리심으로 그 를 하느님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는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사역으로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나오게 되는 어린양의 신부들, 다른 말로 하느님의 양들의 이야기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요셉의 삶도 착한목자의 삶을 힌트 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애굽과 같은 이 세상에 애굽 백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 백성들과 함께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선한목자로서의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바리사이인들과 율사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무죄한 주님은 삽십냥에  팔리신 것처럼 무죄한 요셉도 형들에 의해 팔렸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고소를 당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갇히셨습니다. 요셉도 거짓 고소를 당하고 무덤과 같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찬란한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무덤에서 나오셔서 만유의 왕으로 등극하셨습니다. 요셉도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실세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애굽을 다스립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풉니다. 요셉이 7년간 의 풍년 기간 동안 양식을 비축하는 선견지명을 보이지 않았다면 애굽 사람들은 모두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가 족들의 구원을 위해 애굽 사람들까지 돌보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속사가 완성이 되기까지 악인과 선인에게 일반은총 을 골고루 내려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5:45)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하느님은 이렇게 구속사가 완성되기까지 애굽 사람들에게도 일반은총으로 함께 하십니다. 부와 명예, 건강 등은 모두 일반은총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애굽 사람들을 구하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만을 구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특별 은총입니다.

 

(창세45:5) 5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와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지요? 요셉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앞서 내려오셔서 수난을 당하시고 결국에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내는 선한목자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던 애굽 사람들은 목자를 아주 싫어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목자를 좇아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46:33~34) 33 이렇게 말씀드려 둘 터이니 파라오께서 부르시어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으시거든  34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선조 대대로 저희는 어려서부터 가축을 치는 목자들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고센 땅에서 사실 수 있습니 다. 에집트 사람들은 도대체 목자라면 꺼려서 가까이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요? 세상의 특징은 자신들을 위해 은혜로 십자가를 지시는 착한목자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지요. 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 하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요셉의 삶을 묘사하면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도우셔서 그가 목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49:22-24)  22 요셉은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샘 가에 늘어진,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담장 너머 뻗어 가는 가지라. 23 사람들이 활을 쏘며 무섭게 다그쳐 몰려 왔다가  24 활은 꺽어지고 팔마다 힘줄도 끊어졌다. 이것은 야곱의 강하신 이의 팔이 하신 일, 이스라엘 목자의 이름으로 이룩된 일이다. 

이렇게 요셉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참 목자의 모형으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도 역시 착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목자의 모형으로 모세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목자로 임명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에서 하느님의 양들을 인도하여 이끌어 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히브11:24~25) 24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25 죄의 일시적인 쾌락을 즐기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왕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셨지요? 그리고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마태4:8~10)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 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모세는 하느님의 양들을 애굽에서 모두 이끌고 나왔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출애10:26) 26 우리는 가축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몰고 가야겠습니다. 그 가운데서 얼마를 골라서 우리 하느님 야훼께 바칠 터인데,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는 무엇을 야훼께 드려 예배할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양들을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다 데리고 나가십니다.

  (요한18:9) 9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치 목자가 양들을 먹이는 것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하느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목이 마르다고 하면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의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 떼를 훈육하고 가르치는 목자처럼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단치기도 하고 징벌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바로 착한목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도 역시 양들을 각각 불러내어 그들 앞서 가며 그들을 주인이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가셨던 착한목자이신 주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목자의 모형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는 즉시 고난을 겪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왕이 그에게 눈을 부라리며 호시탐탐 그를 죽이 려 뒤를 좇습니다. 군사를 동원하기도 하고 창을 집어 던지기도 합니다. 세상 왕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때까지 목자인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세상 왕이 죽고(신약의 표현을 빌리면 ‘결박당하고’)다윗은 왕위에 등극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참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양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다가 결국 왕위에 오르시게 되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에제34:22~24) 22 그러나 나는 내 양떼를 구해 주어 다시는 노략질당하지 않게 하리라. 내가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세워 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그가 내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리라. 24

 나 야훼가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의 영도자가 되리라. 나 야훼가 말하였다. 

다윗을 가리켜 목자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가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제케엘은 다윗 왕보다 400년 쯤 뒤에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이 다윗에 대한 예언일 수는 없습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분을 다윗이라 이름 하는가? 그 왕으로 등극하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바로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 은 당신의 양들을 그 어떤 것도 해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목자이십니다. 착한목자의 모형인 다윗이  어떻게 양을 쳤는지 볼까요?


 

(1사무17:33~35) 33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네가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 온 자인데, 너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냐?'  34 그러나 다윗은 굽히지 않았다. '소인은 아버지의 양을 쳐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새끼를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35 소인은 한사코 뒤쫓아 가서 그놈을 쳐 그 아가리에서 양새끼를 빼내곤 했습니다. 그놈이 돌아 서서 덤벼들면 턱수염을 휘어 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를 지키시는 착한목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입을 찢어버리고 수염을 잡아 뜯어내면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결국 모두 그 다윗이라는 목자에게 굴복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짐승 같은 세상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는 착한목자 예수님이 지금 왕으로 등극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자의 이빨에서 곰의 발톱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튼실하고 멋진 양만 보살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약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양에게 더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에제34:16) 16 헤매는 것은 찾아 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 하리라. 

 보세요. 우리의 목자는 잃어버린 자와 쫓긴 자, 상한 자, 병든 자에게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나 같은 것도 하느님이 사랑하실까?’라는 불경한 말은 절대 가당치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연약한데, 나는 아직도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신앙생활에 성실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하느님 이 날 지켜주실까?’ 네, 주님은 병든 자, 약한 자, 상한 자를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래서 우리가 양 아닙니까?  각기 제 길로 밖에 갈 수없는 양이요. 그 천방지축 양들을 위해 목자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양들을 목자로 완성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목자이신 주님을 착한목자, 큰 목자, 목자 장으로 부른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건 아주 중요한 점진적 표현입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착한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자이십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의 생명을 탄생케 하신 분입니다. 그게 착한목자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큰 목자이시기도 합니다. 

(히브13:20-21) 20 영원한 계약의 피를 흘려 양들의 위해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은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당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받으시기를 빕니다. 


 착한목자이신 우리 주님은 천방지축 같은 우리 양 떼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제 善할 뿐 아니라 크신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이제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왕의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성경은 그 큰 목자가 우리를 착한 일에 온전케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착한목자의 삶을 살도록 만드시기 원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큰 목자를 牧者長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베전5:2~4) 2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 주신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잘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신해서 하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법이 되십시오.  4 그러면 목자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님을 목자장이라 부르십니다. 그 말은 그 목자를 따르는 양들도 그 목자의 삶을 좇아 착한목자로 큰 목자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먹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착한목자가 나중에는 목자장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또 다른 작은 목자들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착한목자이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각각 절대적 가치로 사랑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거나 나에게 유익이 될지 안될지로 그들의 가치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그들 앞서 나가며 그들의 위험과 손해를 내가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완전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우리는 힘써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렇게 완성해 놓으셨고 목자이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착한목자를 좇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착한목자가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든지 기쁘게 따라가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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