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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께서 하시는 일(요한1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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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열 [daniel8155] 쪽지 캡슐

2019-06-16 ㅣ No.130426

2019년6월16일/주일복음말씀묵상/ † 성령께서 하시는 일(요한16,8-15)

 

 

 

<세상을 책망하심>

요한16,8절은 “그분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여기서 책망하는 것은 설득하는 것, 유죄 판결하는 것, 사람들을 자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오시면 믿는 이의 영을 소생하고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죄는 아담을 통하여 들어왔고(로마5,12), 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며(요한16,10; 1코린1,30), 심판은 사탄에 대한 것으로서(요한16,11), 사탄은 죄의 창시자이며 죄의 근원이다(요한8,44). 아담 안에서 우리는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16,9).

  

우리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은 우리에게 의(義)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의롭게 된다(로마3,24; 4,25). 만일 우리가 아담 안에 있는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 남아 사탄이 받을 심판을 영원토록 함께 받을 것이다(마태25,41). 이것이 복음의 주요 요점이다. 성령은 이러한 요점들을 사용하시어 세상을 책망하신다.

 

9절은 “‘죄에 대하여’라 한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라고 말한다. 최초로 죄에 대하여 알게 하신 이는 하느님이시다. 부정하고 불법하며 불의한 것을 죄라고 말한다. 부정이란 법 규정에는 없어도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더러운 것을 말하고, 불법이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윤리 규정을 어기는 것을 말하며, 불의란 하느님의 공의를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모두 죄라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죄와 성경이 말하는 죄는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다. 죄란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도덕적인 것, 혹은 윤리적인 가치에서 어긋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다. 곧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다.

 

죄의 댓가는 사망이다. 사망은 죄에서 오며 또한 죄의 결과이다(로마6,23). 그런데 예수가 오셔서 대신 속량해 주셨다. 속량을 속신(贖身)이라고도 하는데, 종의 신분을 면하여 양민이 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빚을 갚아 주셨다는 말이다. 예수가 오시기 전 구약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였다. 율법을 어긴 죄들은 모두 형벌로 다스려졌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다음부터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었다.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대속의 길을 마련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곧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예수가 대신 죽으셨으나,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는 다시 죽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대속을 위한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그래서 요한3,18절은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느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순종치 않던 자들이었다. 아담 안에서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불순종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고 거기서 해방되었다. 불순종은 지옥 갈 죄가 아니다. 하느님은 죄의 기준을 다시 정해 주셨다. 곧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불의요, 부정이요, 불법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는 구세주가 없다. 죄를 대속하실 하느님의 독생자는 한 분뿐이기 때문에 다시 보내실 아들이 없다.

  

또 그 독생자는 하나뿐인 목숨을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 내놓으셨기 때문에 다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내 놓으실 목숨이 없다. 그러므로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이다. 도둑질한 죄도 용서받을 수 있고, 살인한 죄도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지만, 믿지 않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

 

은혜와 긍휼(자비)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에 믿지 않는 자는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마태5,7)고 한 것이다. 그 긍휼은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는 단 하나 뿐이다. 그 은혜는 하느님의 아들이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리심으로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그 은혜가 아무 소용이 없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씀과 같이, 은혜를 무시한 자들에게는 전혀 가망이 없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요, 하느님과 영원히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은혜 받지 못한 것이 죄이다.

  

10절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곧 이 세상의 의인은 예수 한 분뿐인데, 그 예수가 하늘로 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의인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말하는 의인과 신약에서 말하는 의인의 의미가 다르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인은 신분상 의인이 아니라 그 의를 사모하는 자들을 일컫고, 신약에서의 의인은 그 자체가 의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노아나 롯, 아브라함 등을 의인이라 했고(창세6,9; 18,22-23), 신약에서는 예수만이 의인이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만 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예수, 이 둘 뿐이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은 이미 죄인이요, 마지막 사람은 의인이다. 의인인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하느님은 그를 살리셔서 하늘로 올리셨다.

  

그러므로 “의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곧 세상에는 의인이 없다. 아무도 의인인 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의인이 없는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산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함을 받을 때, 곧 칭의를 받아 생명에 이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했음을 온전히 믿을 때,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께서 우리의 죽었든 영을 소생시키시고 생명의 성령으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믿음으로 우리는 깨끗함으로 받았으므로 내 영 안에 오실 수 있는 것이다!

 

11절은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한다. 포도원 소출을 받으려 간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겠다고 난동을 부린 악한 소작인들처럼(마태21,33-41), 세상 임금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시험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심판하려 하심이었다(1요한3,8).

  

마귀도 하느님의 아들을 알고 시험했고, 귀신들도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루카4,34, 41)라고 소리치며 발악했다. 이것들은 이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줄 알고 있었고 두려워서 떨었다고 했다(야고2,19).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의 신분을 알고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고, 곧 이어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태16,20)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마귀를 심판하러 오신 예수는 마귀를 정죄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신분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리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전달하심>

12-13절은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Bu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he will speak only what he hears, and he will tell you what is yet to come.)”고 말한다.

  

지금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해주면, 제자들은 자기의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지만 성령이 오시면 감당할 것이다. 그가 오시면 내 영광을 너희에게 나타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후, ‘내 영광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주셨으니, 성령이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말씀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만이 예수를 알게 하신다.

 

성령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제자들에게 밝히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이며 또 어떻게 새로운 상황들에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처럼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예수를 초월하여 체험을 앞세우거나 아버지의 말씀을 알기도 전에 성령의 체험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신비주의로 흐르기 쉽다.

 

성령, 곧 진리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곧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이다. 어둠속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인도받고, 빛 가운데 있을지라도 더 밝은 빛으로 인도받고, 깨닫고 순종하고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의 큰 역사 속에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미 말씀하신 그 진리를 깨닫도록 일러 주신다.

 

“장래 일(장차 올 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다니엘서, 요한묵시록 등에서 지시한 예언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다니12,4; 2베드1,21).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이므로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 것이다. 특히 다니엘서, 요한묵시록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13절의 말씀이 어떤 시대, 어떤 믿는 이라도 성령의 직접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국한하여 주신 것이며(요한14,26),

둘째 이유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아들로부터 들은 것만 말하신다.”는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업을 우리가 깨닫도록 설명해 주시는 일을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바로 이것이 신약성경에 나타났으며, 이렇게 하여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14절). 곧 신약성경은 바로 이러한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완성인 것이다.

넷째는 그리하여 이제 모든 믿는 이들은 이미 성령에 의해 설명된 것들, 곧 신구약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충분히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요한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진리가 먼저 들어온 다음에 성령이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오직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실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에 의해 그 말씀이 깨달아질 것이며, 그에 따른 체험과 확신으로 인해 비로소 진리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는 성령이 오셔서 능력의 말씀들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표적들을 나타내 주심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하심과 살아계심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적과 체험도 그 부활의 증거로 성령이 주시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믿지 않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주장하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고 성령으로 인도받아야만 한다. 성령과 진리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내가 너희 안에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14,10절)라고 말한다. 성령이 오셔서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

 

14-15절은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셨노라”고 말한다. 예수가 아버지께서 들으신 것만을 말씀하셨듯이, 그리고 예수에게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듯이, 성령도 역시 예수에게서 받아서 알게 된 것만을 말씀하실 것이며, 그리함으로써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17,5절은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영광은 본래 아버지의 것인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아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영광과 그에 속한 것들은 다 아들의 것이기 때문에 아들은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알리리라”고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오신 것은 독생자의 영광을 알리기 위함인데, 그 영광은 창세전부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것이다. 성령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받으신 예수만을 증거 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잘 알아야 한다. 성령은 오직 예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예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모두 예수의 것이다. 따라서 성령이 아버지의 것을 말할지라도 그것은 곧 예수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은 예수를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하느님을 알고, 성령으로 예수를 알고, 성령으로 말씀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 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고, 예수를 알 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되고, 말씀을 알 때 비로소 성령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된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첫째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둘째는 그분은 진리의 영으로서 믿는 이들을 모든 실재(진리) 안으로 이끄신다. 곧 성령은 아들의 온 존재와 아들이 소유하신 모든 것을 믿는 이들에게 실재가 되게 하신다. 아버지의 온 존재와 아들이 소유하신 모든 것이 성령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리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 안으로 넣으지셔서, 믿는 이들과 연합되시는 문제이다. 셋째, 성령은 주로 다니엘서와 요한묵시록에서 계시된 장차 올 일들을 알리신다(묵시1,1, 19).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세 방면은 요한의 글의 세 부분, 곧 복음서와 서신서들과 묵시록과 일치한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고 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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