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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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제 십자가 (루카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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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9-07 ㅣ No.132389

 

 

[연중 제23주일]제 십자가 (루카14,25-33)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의 뜻을 깨닫겠냐고 한다. (지혜 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 달라고 옥중에서 부탁한다. (필레 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루카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연중 제23주일 제2독서 (필레몬9ㄴ-10.12-17)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2)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목을 돕는 이들 가운데 몇몇을 향하여 '아들'이라고 불렀다.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고(2티모1,2), 티토를 믿음에 따라 착실한 아들이 된 자라고 했다(티토1,4).

 

옥중에 갇힌 상태에서 얻은 아들이라고 지칭한 오네시모스 역시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거듭났으며, 그의 사목을 많이 도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얻은'이란 의미로 번역된 '에겐네사'(egennesa; I have begotten)의 원형 '겐나오'(gennao)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전존재의 변화를 나타낸다.

 

전에는 죄를 짓고 도주한 노예였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이다.

 

당신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조직 안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부권(父權)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사도 바오로는 그들과 달리 랍비문헌과 쿰란 문헌에서 발견되듯이 제자들에 대한 영적 스승으로서의 부권을 가지고 오네시모스를 대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오네시모스를 영적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안에서 갖게 되는 스승(교사)과 제자(학생)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오네시모스'는 '유익한 자'라는 뜻으로 당시 노예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출신의 필레몬의 이교도 노예였다. 당시 콜로새 출신의 노예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많았고,  게다가 자신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서 도주한 오네시모스의 행위는 주인 필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이 편지를 접한 필레몬은 이렇게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사도 바오로의 영적 아들로 거듭 났다는 소식이 그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내 심장과 같은 그를'  (12)

 

 

'심장'으로 번역된 '스플랑크나'(splangchna; bowels; heart)는  7절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본래는 '창자',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내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긍정적인 감정 즉 친절, 자비심, 동정심, 연민의 정과 같은 추상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인의 마음에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을 갖도록 해주는 종이나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가리켜서 자신의 '스플랑크나'(spllangchna)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오네시모스에게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게 끓어넘치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것은 친자녀 이상으로 자신의 심장처럼 극진히 사랑하는 자이며 심복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비록 노예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자신을 섬기는 그 모습 속에서 마치 친 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극진한 사랑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회심한 오네시모스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존재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 필레몬으로부터 오네시모스가 용서를 받아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으므로, 심장과도 같은 그를  일단 필레몬에게 보내는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복음 (루카14,25-33)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6~27)

 

루카 복음 14장 26절에서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미세이'(misei; hate)의 원형 '미세오'(miseo)는 단순히 '미워하다'(히브1,9)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미세오'라는 동사는 셈족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쓰였고, 실제적으로는 '덜 사랑하다'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마태6,24).

 

본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에 나오는 '더 사랑하다'표현 속에서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절은 마태오 복음 사가의 표현과 관련지어 볼 때에도,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덜 사랑하라는 셈어적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이 가리키는 '덜 사랑하다'는 뜻은 상대적으로 가장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그러나 '마세오' 동사는 위의 의미 뿐만 아니라 '근본적 단절'이라는 뜻도 있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본절에 열거된 대상들과 단절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무엇보다 우선하여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히려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미워하라'는 셈어적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루카 복음 14장 27절은 26절에 이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두번째 조건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짊어지고'에 해당하는 '바스타제이'(bastazei; bear; carry)의 원형 '바스타조'(bastazo)'옮겨가다', '참다', '짐을 지다'는 뜻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의 고난의 모습을 다각도로 묘사한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38절에서는 '취하다'는 뜻의 '람바노'(lambano) 동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루카 복음 14장 27절'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표현 대신에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마태오 보다 루카 복음사가가 더욱 더 강한 어조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해야 함을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 처형까지 예를 들면서 강조하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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