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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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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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9-09-19 ㅣ No.132607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는 한국인만을 위한 성당을 마련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몇몇 본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지 본당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세 가족이 지내는 게 쉽지 않지만 서로 친교를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도와주었던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습니다. 한인 공동체도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현지 본당에서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주보 성인은 대부분 한국의 순교 성인들입니다. 먼 이국땅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전구와 도움으로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가 뜨거운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국회도 한 지붕 두 가족이 지내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입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정당이니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삶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결자해지(結者解之)인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가슴에 지나친 비수를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은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는 정당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을 선택할 겁니다. 초등학생들도 잘하는 걸 국회의원이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는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저는 오늘 박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사회였습니다. 천민과 노비가 있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자유와 민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이 있었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서구 사회에서 전해진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에게 해 준 게 바로 나에게 해 준 거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교리는 철저한 신분제인 조선의 사회와 어울리기 힘들었습니다. 이것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오랜 전통으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몇 년씩 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의 관혼상제는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풍수지리를 이용해서 묏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사주와 팔자를 이용해서 길일을 택하였습니다. 남녀가 유별하였고, 유교의 가르침이 마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허용하지 않는 천주교의 방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미신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문화적인 충돌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사회적인 불만과 어려움을 돌리기 위해서 외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이용하였습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으로 천주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 가야 했고, 순교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그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겁니다.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조선의 학문과 사상의 폭은 더 넓고 깊어졌을 겁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박해의 이유입니다.

 

네 번째는 신앙과 신념이 이유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던 건 바로 네 번째인 신앙과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성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울어라, 선비네 휜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때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줄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새로운 개벽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천민도, 노비도, 백정도 없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신분과 능력과 재능과 출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믿음과 사랑으로 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에 죽어서도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박해의 칼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순교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칼로도, 환난으로도, 박해로도, 굶주림으로도, 헐벗음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 순교 신앙입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순교 신앙입니다.

 

이런 순교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세상은 풍요롭고, 세상은 가지고 싶은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환난, , 박해가 없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멀어지곤 합니다. ‘다음에 하지 뭐라고 하는 영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죄에 물들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걷지 않는 사람은 엠마오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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