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순교자의 「영적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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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찬 [jesus_maria] 쪽지 캡슐

2019-09-26 ㅣ No.96062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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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순교자의 「영적 수기」에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이틀 동안 끊임없이 순교에 대한 큰 열망을 느껴
순교자들이 당한 온갖 고초를 견디어 내고 싶어했습니다.

나의 주여, 나의 구세주 예수여,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갚아 드리겠습니까?
당신의 손에서 당신 고통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아버지와 성령의 면전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어머님과 그분의 정결하신 배필 성 요셉,
천사들, 사도들, 순교자들,
우리 복되신 사부 성 이냐시오와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면전에서,
그리고 끝으로, 나의 구세주 예수 당신의 면전에서 서약하오니,
당신의 영원한 자비로써 부당한 종인 나에게
언젠가 순교의 은혜를 베불어 주신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 은혜를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내 여생 동안 당신을 위해
내 피를 흘리어 목숨을 바칠 계기가 생긴다면,
그때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다른 식으로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는 한,
그 계기를 피할 자유도 없고 권리도 없게끔 내 자신을 묶어 놓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이 다가 올 때 크나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것을 당신의 손에서 받아들이기로 서약합니다.

그래서 온갖 사랑을 받으실 만한 나의 예수여,
이제부터 벅찬 기쁨으로 내 피와 내 몸과 내 생명을 바쳐 드립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여,
나도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게 해주소서.
내가 당신에게서 그렇게도 행복한 죽음의 은총을
받을 만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소서.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의 구세주시여,
당신의 손에서 당신 수난의 "잔을 받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예수여!

나의 하느님이시여,
이 미개의 나라가 아직 당신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죄가 뿌리채 뽑히지 못했다는 것을 당신이 보지 못하십니까!
마음 아플 뿐입니다.
나의 하느님이시여,
나로서는 온갖 고초들이 내 위에 덮쳐도,
이 나라의 포로들이 당하는 가장 잔인한 고초를 당한다 해도
나는 기꺼이 그런 고초들에다 나를 바치고 나 홀로 그 모두를 받겠습니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순교자의 「영적 수기」에서 (The Jesuit Relations and Allied Documents, The Burrow Brothers C",]






얼려 죽임을 당한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1732-1792, 61세 순교)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에서 돈 많은 양민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는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천주교에 대한 말을 듣게 되었지만 주위에는 교리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었기에 아무에게도 천주교에 대한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 날 "나는 50년 이상을 무익하게 살아 왔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떠난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걱정들말고 나를 기다리지 마라" 하고는 진리를 찾아 집을 떠났다. 원시장은 당장 길을 떠났고, 1년 이상이나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 그가 고향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의 친척과 친구들이 그에게 달려가 무수한 질문을 하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50여년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지금은 수 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생명의 약을 가지고 있소. 그것을 내일 설명해 주리다."

과연 그 이튿날이 되자 "수 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약이 무엇일까?" 하고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시초와 마지막,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 원죄,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계명, 천당과 지옥, 요컨대 그가 천주교에 대하여 아는 것을 모두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자, 이것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 누구나 영원히 사는 방법이오. 여러분은 모두 내 말을 내 유언으로 알고 나처럼 천주교를 신봉하시오." 하였지만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의 약 인줄 알았다가 실망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원시장은 어떤 말보다도 행동으로 실천하여 착한 모범으로 타인을 회개시켰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자기의 성격을 완전히 정복하여 사납던 자신을 극복하고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구해 주고, 자기의 지식으로 외교인들을 권고하는 열성을 보이며, 기쁘게 살아가는 그의 변화된 삶이 놀랍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여 부인과 자녀 등 가족들이 변화되고 친척들이 변화되며 이웃사람들이 변화되어 그가 입교한지 2년쯤 뒤에 그 집안 전체가 천주교인이 되었고, 원시장의 열성에 감탄한 외교인들 중의 30가구 이상이 입교하였다.

이렇게 신앙의 삶을 살던 어느 날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공주의 감사가 천주교인인 그의 사촌형인 원 시보 야고보를 지명 수배하였다. 그러나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를 따라 이미 도망하고 없었다.
포졸들은 원시장에게 "당신 사촌이 어디로 갔소" 하니 원시장은 "죽기가 무서워서 숨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하자 포졸은 "우리는 관장의 명령을 받고 그가 천주교인이라 잡으러 왔소. 그러나 그가 여기 없으니 대신 당신을 잡아가겠소"하며 원시장을 잡아 관아로 끌고 가 형장에게 넘겼다.


형장은 그에게 "당신 사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데 당신도 믿소?" 라고 묻자 원시장은 큰소리로 주저하지도 않고 "나도 천주교를 신봉하오"라고 하였다. 형장은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천주를 배반하면 모든 소문이 순전히 모함이라고 하겠다면서 풀어줄 것을 약속하였지만 원시장은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라고 일축하였기 때문에 그는 홍주 목사(사또)에게 보내졌다. 

사또는 그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천주를 배반하고 공범자들을 고발하며 다시는 천주교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즉시 놓아주마"라고 하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천주를 배반하다니 절대로 안됩니다. 저는 또 다른 천주교인들을 밀고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사또는 성이 나서 그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 70도를 치게 하였다.

원시장 베드로는 모든 고문을 참을성 있게 견디면서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사람의 본분과 외교인들의 미신의 헛됨 따위에 대하여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튿날도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으로 고문을 당하였는데, 또 주리를 틀리고 그 전날보다도 더 혹독하게 치도곤을 맞아 그의 살점은 너덜거리고 두 어깨뼈가 부러지고 등뼈는 으스러져 허옇게 드러났다.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그는 옥으로 다시 끌려갔다.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만족과 가쁨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는 옥졸과 아전과 포졸들에게 전교하기 시작하였고, 며칠 후에 한 교우가 그를 보러 감옥을 찾아 왔으므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옥살이하는 동안 사또는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여 그에게서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사또는 원시장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 목숨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 나는 네 마음을 좋은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썼다. 그러나 네가 아무 말도 듣고자 아니하고 죽기를 고집스럽게 원하므로 나는 감사에게 보고를 하였더니 너를 쳐 죽이라는 명령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죽을 것을 알라" 이 말이 떨어지자 그의 결박을 더 조이고 무서운 고문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원 베드로는 그것을 용감하게 견디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하도 으스러져서 이제는 수족을 쓸 수도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감옥으로 떠메어 가야 하였고, 그가 제 손으로 먹을 수 없게 되자 음식을 입에 넣어 주어야만 하였다. 마침내 감사와 수령이 모여 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는 마지막 노력을 하여, 그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찾는 자녀들 이야기를 그에게 하면서 회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원 베드로는 "그것은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하면서 배교를 마다하니 그들은 사형수에게 관례로 주는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이고 나서 마침내 그의 결박을 더 세게 조이고 무서운 고문도 가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이려고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사또와 포졸과 형리들은 기진맥진하여 서로 말하였다. "이 죄인은 매맞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 끝장을 낼 방법이 없소"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이보시오, 나으리. 나도 인간인지라 매맞으면 아픕니다. 왜 못 느끼겠소. 그러나 천주께서 여기 계시어 저를 직접 굳세게 해 주십니다"라고 하면서 천주께서 나와 함께 여기 계시어 자신을 굳세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었다.

순교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적 노력인 응답이 있었기에 순교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사또는 섬뜩한 생각과 등골이 서늘하여 "저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라고 하면서 더 세게 매질을 시켰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그렇게 죽이는 것을 단념한 사또는 그를 결박하여 물을 퍼붓고 추운 밤중에 밖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원시장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였고 온 몸에 물을 뒤집어썼다. 이미 그의 온 몸에 얼음이 뒤덮였다. 이 무서운 형벌 중에도 그는 오직 예수님의 수난만을 생각하며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라고 하며 감사와 봉헌의 기도를 드리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기 위하여 매맞고 얼음에 냉동되어 죽어 가는 원시장 베드로였다. 닭이 두 번째 울 때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고 1792년 12월 17일 61세로 홍주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순교자영성센터의 글 중에서)







낮은 자리 (루카 14,1.7-14)


복음에서 주님은 잔치 상을 둘러보시며 서로 다투어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광경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교훈하십니다.

첫째로, 어떤 모임이나 잔치에 초대되어 갔을 때, 윗자리에 서둘러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14,8). 만일 윗자리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초대되어 왔다면 그 자리를 어쩔 수 없이 내어 주고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 앉아야 할 것이라 이르십니다(14,9).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맨 끝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으로부터 윗자리로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듣느다면 좌중의 영예를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14,10).

사람은 누구나 으레 남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자신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처럼 자신을 남보다 높이는 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 대신 멸시를 받게 마련이고, 반대로 자신을 진심으로 낮추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잘 알고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즐겁고 여유 있게 지내는 사람은 우선 슬기와 지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14,11)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웃을 초대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14,12).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 이르십니다. 그들은 갚을 능력이 없지만,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14,14).
이와 반면, 갚을 능력이 있거나 되갚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 즉 형제나 친척, 잘 사는 이웃 또는 자기와 직접 간접으로 이해 관계가 있는 자들만을 초대한다면, 얼마 후에 그들로부터 도로 받게 됨으로써 갚음은 끝나고 하느님께로부터는 더 이상 받을 아무런 상급이 없다고 하십니다(14,12).

그런데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면 이웃을 초대한 대부분의 경우는 한 마디로, 언제인가 그들을 이용해 보겠다는 속셈이었거나 더 많은 갚음을 바라느 심정에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분수를 지키며 안전하게 낮은 자리를 거니는 한편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관심 밖에 있고 버림을 받고 있는 불우한 이웃을 특별히 의식하며 그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보살핍시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느님 앞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대변해 줄 것이며 주님은 우리보고 "저 윗자리로 올라 앉으라"(14,10) 하실 것이며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후하고 넘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14,14).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명상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적은 발전으로 만족하십시오.

언젠가는 달리고 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순종하십시오.

그것은 하느님을 택한 영혼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벌이지만

나중에는 꿀을 만드는 큰 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하느님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선물로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비오신부)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 (루카 13,22-30)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문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다는 어두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받을 자의 수를 예정하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악행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구원에 관한 다음 세가지 가르침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 구원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현세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다 채우면서 후세에서도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원하겠지만 그 때에는 말째가 될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또 그 말씀을 서로 자주 나누었을지라도(13,26), 그 말씀을 생활에 조금도 옮기지 않고 뒤에서 악을 일삼으며 회심을 미루고 죄악으로 흐르는 일생이었다면, 그는 실제로 하느님을 모르는 자요, 하느님께서도 그 날에 그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태오 7,23).

셋째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함을 보여 주십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많이 드렸고(마태오 7,21) 주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고 자랑할는지 모르지만(마태오 7,22),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와 반면, 비록 세상에서는 천시를 받고 따돌림을 받아가며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만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간직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며 선행으로 가득 찬 일생을 보냈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자요, 하느님 나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첫 자리에 초대될 것임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말씀인 주님의 말씀을 오늘도 우리 생활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계속 흘려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활이 마치 죄악을 밑바탕으로 지탱되고 있지나 않은지요?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는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다 같이 진심으로 회심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곧바로 실천에 옮겨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말을 하면서도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신앙 생활이라면,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보장이 되어 있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주님의 말씀을 많이 들은 자도 아니요, 주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또 말하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그 말씀을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자입니다(마태오 8,21).






병자성사


병자성사는 어떤 성사인가요?
교회는 질병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대한 위험에 처한 환자들에게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을 이겨나갈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즉 교회는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고로 허약해진 환자의 마음과 신앙을 굳세게 하고, 병자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잃어버린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니다.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다른가요?
병자성사와 종부성사는 같은 성사에 대한 두 가지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이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성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만이 아니라 중한 병을 앓는 환자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 73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병자성사는 "죽을 위험이 임박한 이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육체가 쇠약 해지거나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죽을 위험에 처하기 시작하면 이미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규정에 따르면 급격히 노쇠해지는 노인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본당에서는 노인들을 위해서 성당에서 공동으로 병자성사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는 것은 합당할 뿐만 아니라 권장할 일입니다.


병자성사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첫째, 병자성사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강화함으로써 병이나 노쇠의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평화와 용기를 줍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병들고 노쇠한 이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일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돌보시는데, 병자성사는 이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합니다. 또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은 병자성사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둘째, 병자성사를 통해서 병자의 영신적인 구원에 적합한 경우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목적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서 구원을 얻게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환자는 예외없이 자신의 병이 나아서 다시 건강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은 그 사람의 구원에 유익이 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도 내에서 치유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다고 모든 병이 반드시 다 치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청하였지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는 대답만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육체적인 치유만을 바라고 병자성사를 반복해서 받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셋째, 병자성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병자 자신의 고통을 일치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이 받으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몸소 감수하셨습니다. 병이 낫지 않더라도 열심히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합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골로 1,24)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통이 자신과 교회에 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넷째, 병자성사는 아직 남아 있는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베풉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를 위한 기도와 도유가 "병자를 구할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이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병자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5 참조).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는 죄가 있다면 병자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게 됩니다.


병자성사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병자성사의 은혜는
첫째, 생명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둘째, 병자를 위로하고 유혹에 강하도록 하고
셋째, 경한 죄를 사면하여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고
넷째, 구원에 유익하다면 육체의 건강을 줍니다
.

병자성사를 받으면
첫째, 상존의 은총(성화은총)을 더해 주고
둘째, 죄와 벌이 사해집니다.
셋째, 육신의 병을 낫게 해주고 병자의 영혼을 견고하게 하여 악의 세력과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서 굳세집니다.
넷째,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갖게 되고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냉담 중이거나 견진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이거나 혼인 장애(조당)가있는 신자가 병자 성사를 받아 임종 전면은사(전대사)를 받고, 견진성사와 혼인성사를 받지 못했다면 견진성사를 받은 후 혼인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자 성사 및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병자성사 예식서 30, 31,115-135항. 사목지침서 제 98조 참조)


병자성사로서 중죄가 사해질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병자가 고백할 수 없더하도 그가 통회하면 중죄가 사해집니다.


생전에 몇 번이나 받을 수 있나요?
병자성사는 반복해서 여러 번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병이 들었을 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은 병자가 건강을 회복했다가 다시 중병에 걸리게 되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으며, 같은 병으로 앓다가 병이 더 중해지는 경우에도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병자성사를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잘 받고, 신망애 삼덕을 발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만사를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1)우선 병자로 하여금 신망애 삼덕의 정을 일으키도록 하여주고, 자기 죄를 성찰하여 통회를 발하게끔 하고, 타인과 불목한 일이 있으면 용서케 하고, 채무관계라든가 기타 병자로 하여금 심적 부담이 없게끔 해야합니다.
(2)육신의 준비 : 성유를 바를 부분(이마와 두손바닥)을 깨끗이 합니다.
(3)가족의 할 일 : 방을 깨끗이 하고, 조그만 탁자위에 십자고상, 초, 성수, 깨끗한 물을 담을 그릇 하나, 수저 하나를 준비합니다.


어떻게 청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병자의 상태가 위급하지 않은 경우에는 본당 사무실이나 구역 책임자에게 신청해서 신부님과 시간을 맞춰 약속하면 됩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경우에는 병원의 원목 신부님에게 청하거나, 원목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에는 소속 본당 신부님이나 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부님에게 청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도 병자성사는 죽기 전에 받는 성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성사를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병자성사를 청해서 받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성사는 공동체의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환자의 가족이나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병자성사가 집전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병고를 겪어야 하는 것은 환자 자신이지만, 가족이나 신자들이 함께하면서 관심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다면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병자성사 예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병자성사는 말씀 전례로 시작해서 성사의 핵심 부분인 안수, 도유로 이어집니다. 이는 말씀과 성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좀더 자세히 얘기하면, 사제는 성호경으로 예식을 시작하고 통회의 기도에 이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간단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구하는 호칭기도를 바칩니다.

말씀 전례에 이어서 사제는 말없이 병자에게 안수하는데, 이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교가 축성한 성유를 병자의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면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그리고는 마침 기도를 바칩니다.

죽음에 직면한 환자는 병자성사 외에도(아직 의식이 있으면) 성체를 영하게 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 영하는 성체를 노자성체(路資聖體)라고 합니다. 먼 길을 떠날 때 노자를 지니고 가듯이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리스도를 노자로 모시고 가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함께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병자가 지은 죄가 있으면 병자성사를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마땅 합니다. 그러나 병자성사 중에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성사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곧 이어서 병자성사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동시에 두가지 성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해성사 때에는 함께 있던 가족들이나 신자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신부님께만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사제, 즉 신부와 주교만이 이 성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의 집권자는 사제입니다. 특별히 본당신부는 그 본당 신자에게 성사를 줄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성경에 병자성사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해 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마르코 복음 (6,13 참조)에는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과 병자성사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원로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렇게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에 의하여 예시되고 야고보 사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병자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병자인 경우에는 어느 누구나, 그리고 어느 때든지 받을 수 있습니까?
병자성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 즉 첫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철들지 않은 어린이나 전면적인 정신장애인은 병자성사를 받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가벼운 병이나 죽을 위험이 없는 만성병 환자는 받지 못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해도 사형수나 파선 중인 배의 승선자나 전쟁 중의 군인들은 병자성사를 받지 않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는 의인의 성사이므로 의식이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면 고해성사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절하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는지요?
정례서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 있는 신자들도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위험한 병 때문에 외과수술을 받아야 할 때 병자가 수술 전에, 또 노환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쇠진해지는 노인들은 병세의 위험성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병세의 위독 상태에서는 그 정확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하지 말고, 필요한 경우에는 의사의 의견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성사를 받을 사람이 병세가 더 악화될 단계까지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말고 병자가 위험해지기 시작하려 할 때 바로 성사를 받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하여 들은 기억이 있는데 어떤 경우입니까?
조건부 병자성사에 대한 규정은 없어졌으며, 이런 경우 병자성사는 일상적인 형식으로 집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병자가 이성을 잃어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지라도 고백을 듣고 성체를 영해 줄 수는 없지만 병자성사를 주어야 합니다. 사제가 환자에게 갔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면, 그를 위하여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조건부 병자성사는 금지됩니다.


환자가 회복되었다가 다시 중병에 빠지면 이 성사를 다시 받을 수 있는지요?
병자 성사는 환자가 전의 중병으로 회복된 후 새로운 중병을 앓거나 오랜 지병 중에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 다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가 점차 악화되더라도 병자성사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병자가 임종하였을 때 어떤 조치를 하여야 합니까?
병자가 임종하면
첫째, 즉시 본당에 연락하고 이웃 교우들에게 알려 연도하게 하고
둘째, 본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준비하고
셋째, 교회(묘지)의 사용 허가 수속을 하고
넷째, 가족들이 화목하고 정중하게 고인에게 맞갖은 예의로 그러나 허례의식을 없애고 신앙을 바탕으로 장례의식을 준비하고,
다섯째, 연도와 위령미사를 바치며 고인의 유지를 따라 살도록 다짐하고, 가문과 사회와 교회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고인을 위하는 일입니다
.

(GoodNews의 7성사 중 병자성사에서)






사제는 땅위의 천사


우리가 사제의 신성한 직분을 이해한다면 미사의 무한한 위대함을 보다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은 사제직은 세상의 모든 직분중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에프렘 성인은 사제란 무한한 존엄의 직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성직의 존엄이신 사제는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카시안은 하느님의 사제는 모든 지상의 주권자들과 모든 천상의 직들 위에 높이 들어 올려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제보다 높이 계시는 분입니다.

* 교황 이노슨트 3세 성하는 "사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존재입니다. 하느님보다는 아래에 인간보다는 위에 사제의 직분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데니스 성인은 사제는 성스러운 인간이며, 사제직은 성스러운 직분이라 명하셨습니다.

*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은 사제를 존경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축복받은 사람이고, 사제를 모욕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토마스 성인의 말씀에 따르면 사제직의 존엄은 천사의 존엄보다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 "죄인을 용서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단 하나의 죄를 용서하는 데도 주님의 모든 전능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의 능력이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 순교자 이냐시오 성인 : 사제는 교회의 영광이며 기둥입니다. 또 천국의 문지기이기도 합니다.

* 치쁘리아노 성인 : 하느님의 진정한 영을 받아서 사제직을 받도록 신탁된 사람들은 경외감과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 에피파니우스 성인 : 저는 사제의 직분을 기꺼이 수령하고자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제 직분은 두려울만큼 성스러운 것입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사와 사제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저는 우선 사제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천사께 인사하겠습니다."
성인은 끝까지 성직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


하느님은 사제를 돕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 가난한 상인이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족은 세속적인 것들은 많이 갖지 못했지만 매우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한 많은 미사에 함께 참례하곤 했습니다.
가까운 교구에 허약한 체질에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정신적 균형에 문제가 생기고 더 이상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한 젊은 사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안 되는 한에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착한 상인은 아내에게 자기 집에 작은 방을 정돈하여 신부님께 묵으시도록 하고 음식을 마련해 드리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젊은 사제도 이 부부의 친절한 초대에 기꺼이 응해, 수년간 편한 마음으로 한동안 이 집에 머물다 떠나곤 하였습니다.
이 사제는 죽음의 때에 이르러 의식을 온전히 회복했습니다.  사제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가장 절실한 기도로 이 선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십사 청하였습니다.
"오! 주여, 이 사람들이 당신의 사제인 제게 베푼 것에 수천배로 갚아주십시오. 이 착한 당신의 자녀들에게 정신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함께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친 후 신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는지 들어보십시오. 이 가난했던 상인은 굉장히 장사가 잘 되서 부유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상인의 여동생 중에 네 명이 수녀가 되었으며, 부인의 형제 중에 네 명이 역시 수녀가 되었습니다. 이 상인은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는 신자들은 큰 보상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좋은 사제를 봉헌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제만큼 주님께 큰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사의 신비)






하느님께서는 주시는 사명의 확신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의 확신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 이 짧은 글로서 표현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은 자기의 은사에 대한 인식과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기적이나 이상으로 이런 부르심을 받았다, 이런 사명을 받았다고 하는 경우는 제외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명을 말할 순 없습니다. 또한 사명은 신앙을 기본으로 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신앙인이면서 사명을 받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명에는 우선 내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각 사람마다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틀림없는 것은 사명에 대한 내적 확신이 없는 사람의 신앙 생활은 힘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명은 '은사'와 함께 주어집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지 않으셨고, 베드로에게 유대인들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에게는 이방인을 위해 일할 사명을 주셨죠. 그것은 바오로가 가진 은사와 그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 일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그렇게 준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형제자매님은 사명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형제자매님은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잘 하실 수 있습니까?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형제자매님의 달란트, 재능이 무엇입니까? 그곳에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엿장수에게 엿을 팔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사명으로 주십니다.
요약하면, 사명에 대한 확신은 그 개인의 신앙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르고, 그 방법과 확신의 과정이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답게, 사명자답게, 직분자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명은 이미 주신 은사와 달란트, 재능의 범위 내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창골산 봉서방"에서 hijjang)






조지 뮐러의 대답



영국의 조지 뮐러(1805~1898)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에 말년에 뮐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조지 뮐러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평판, 선택, 좋은 것, 싫은 것, 원망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나는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느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느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조지 뮐러의 대답은 간단한 대답이지만
가장 중요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부인" 이라는 기초위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을 때 비로소
성경적인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쳐서 날마다 죽이는 것이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기도와 은총, 성령충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너무도 많은 신자들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것" 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생명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임신하지 못하는 부부를 위한 기도


우리 조상들의 주 하느님, 주님은 진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그에게 동무로 주시어 주님을 위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고, 그들을 주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가지고 내려오시어 원수가 간음과 실망이라는 두 가지 죄로 이끌어가기 위하여 닫아 놓았던 태를 열어 수태시켜 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조물주, 거룩하신 아버지, 이 두 자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들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번식력이 있게 하시고, 남편은 그를 받쳐주는 지주(支柱)와 같이 그의 보호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 생명이여, 내려와 생명을 주십시오. 오 불이여, 내려와 다시 따뜻하게 하십시오. 능하신 분이여, 내려와 행하십시오. 내려오십시오! 

올해의 풍성한 수확에 대한 찬미의 축제를 위하여 이들이 산 곡식다발을, 즉 주님께 바라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영원하신 주님께 봉헌된 그들의 맏아들을 바치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시 )


(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드립니다. 아멘 )


*~*~*~*~*~*~*~*~*~*~*~*~*~*~*~*~*~*~*~*~*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돌아가신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를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빌어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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