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성인의 강론에서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회개와 통회를 통한 회심에 대한 필요성입니다. 성인은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발견된, 정화 예식을 위해 물이 담겨진 돌 항아리 여섯개를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는 여섯 개의 수단들과 비유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정결 예식울 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예식에 쓰이는 두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요한 2,6)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 물이 담겨져 있는 돌항아리 여섯 개는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영혼을 정화시키는 통회, 고백, 기도, 단식, 자선 그리고 용서라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항아리 여섯 개는 죄에 물든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여섯 가지 수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통회

   통회는 악에 물든 영혼을 깨끗이 하며 모든 나쁜 생각들을 씻어 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그리고 “예루살렘아, 살고 싶거든 못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쓸데없는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으려느냐?”(4,14) 고 말씁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우리는 “동물을 번제물로 바치기 전에 그의 내장과 다리를 씻어 낸다.”(1,13)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장은 우리의 나쁜 생각들을 의미하며, 다리들은 세속적인 탐욕을 나타내는데 그들 모두는 마땅히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나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시편 51,7)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백

   성 베르나르도는 그의 강론집 중의 한 곳에서 “고백은 모든 것을 개끗이 정화시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애가서에서 “네 마음을 주 앞에 물 붓듯이 쏟아라.”(2,9) 고 충고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포도주나 우유 또는 꿀이 아닌 물로써 씻어내야 합니다. 마음을 포도주로 씻어낸다면, 그 마음 속에는 여전히 포도주의 냄새가 남아 있으며, 우유는 찌꺼기를, 꿀은 달콤한 맛을 남깁니다. 반면에 물로 씻어 낼 경우는 그 마음안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담겨진 포도주의 향기는 악의 모습을, 우유의 색깔은 쓸데없는 미의 탐욕을 그리고 꿀의 달콤한 맛은 어떤 부정한 쾌락을 지녔던 이전의 죄악의 회상을 상징합니다.
   이 저주받을 죄악의 찌꺼기는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쁜 생각과 부정한 죄로 배를 채우고, 또 어린 것들에게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주게 하시렵니까?”(17,14)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고백을 하고 모든 죄악의 찌꺼기를 완전히 물로써 씻어낼 때 당신의 모든 죄는 깨끗이 정화되어질 것입니다.

기도

   하느님은 기도가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증명하십니다. “그들은 울면서 떠나간 길을 위로받으며 돌아오리라. 넘어지는 사람 하나 없도록 탄탄대로로 해서 시냇물가로 인도하리라.”(예레31.9)  하느님은 고아의 간청이나 회개하는 죄인의 통곡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27,10) 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과부의 억울한 호소를 흘리지 않으시고 참회하는 영혼을 모른체 하지 않으십니다. “과부의 눈물이 두 빰을 적실 때 그 여자는 자기를 울린 자를 향하여 울부짖는다.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의 간청은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단식

   하느님은 예언자 요엘의 입을 통하여 단식에 관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2,12)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다음과 같이 단식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마태 6,16)  모세는 40일간의 단식 후에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법은 인간을 정화시키며, 인간을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하느님께로 귀의시킵니다. ‘단식하는 사람의 침은 독사들의 독을 없애버린다’ 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격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세지는 단식을 통하여 얻은 힘이 나약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며, 교활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선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물로 뜨거운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주님은 인간의 자선 행위를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인간의 선행을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신다.”(집회 17,22)
   성서에 의하면 자선은 기부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빵을 풍랑에 밀려 물 위에 떠있는, 방황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먼 훗날에’, 즉 최후의 심판날에 당신은 전에 베풀었던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상의 순례자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선의 베낭을 죽기까지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리하면 심판날에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선의 행위를 베낭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을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신다.”
   매우 민감한 기관인 눈은 가늘고 얇은 막으로 덮여져 있으며 눈꺼풀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보든 동물들을 본능적으로 낯선 물체의 위험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눈을 감아버립니다. 인간 역시도 동물과 같이 섬세하고 민감란 눈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눈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주 그의 눈을 깜박거립니다. 눈꺼풀이 눈을 보호하듯이 선행은 은총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은총은 영혼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합니다. 토비트서에는 자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다.”(4,10)  인간은 자신을 어떤 해로운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눈을 깜박거리듯이, 그의 마음안에 은총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을 깜받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욥 자신도 “친절을 베푸시오. 그러면 당신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형제, 자매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당신이 본능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19,19) 가늘고 얇은 막으로 덮여있는 인간의 눈은 불행에 처한 이웃들에게 마땅히 동정의 눈빛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14,29)  그리고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시원스럽게 꾸어 주어라. 주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15,10)

용서

   용서도 또한 죄에 물든 영혼을 정화시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에서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6,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를 뜻하는 라틴어 ‘avis’ 는 없음을 의미하는 ‘a’ 와 행로 혹은 작을 길을 의미하는 ‘via’ 라는 두 단어에서 유래되어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새는 날아갈 때 일정하게 정해진 행로를 따라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avis’ 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새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분노와 복수의 길로 걸어가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악이 그에게 다가오면 그는 자신의 눈을 감아버립니다.
   엑셀시아스뚜구스는 “당신의 부정한 이웃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입니다. 동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자가 어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동료들에게 자비를 거절하는 자가 어찌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죄지은 이가 하느님의 진노를 두려워한다면, 그는 그의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웃을 증오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자신의 몸을 돌보듯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가장 큰 계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비난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언급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끼쳤던 어떤 해가 인간의 적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의 무지의 탓으로부터 기인되었다면 증오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받은 어떤 해에 대하여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상처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진술한 모든 것은 성서에서 언급된 돌항아리 여섯 개에 관한 것입니다. 이 항아리들은 각각 스물 내지 서른 갈론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갈론은 분량을 재는 치수입니다. 그러므로 스무 갈론은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그리고 서른 갈론은 영광의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앙고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신앙고백, 이 모두는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 백합의 향기 (SEEK FIRST HIS KINGDOM)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