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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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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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0-02-19 ㅣ No.136172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참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적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신체에 뭔가 고장이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체의 고장은 그나마 요즘은 의학의 힘을 빌려 낫게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뭔가 기적이 아니고서는 앞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어떤 조치를 한 후에 뭔가 확인을 하십니다.

 

일단 앞에 무엇이 보이는지 물어보십니다. 눈먼 사람은 뭔가 보이기는 보이지만 확실하고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보이는 형상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걸어다니는 모습이 마치 나무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뭔가 보이기는 보이지만 보이는 현상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보시면 나무 같다고 합니다. 나무는 어떤가요? 사람이 움직이면 팔이나 다리가 움직이며 걷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무처럼 걷는다는 것은 깁스 환자가 걸을 때의 걸음처럼 성경은 묘사를 합니다. 실제 사람을 나무로 만약 인식을 한다면 그런 상태로 뭔가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게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더 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신 후에는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완치가 돼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복음은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면서 당부하시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벳사이다 마을로는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마을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고을이라고 매일미사 묵상난에 친절하게 설명이 돼있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회개하지 않은 곳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죄악으로 물든 환경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눈먼 이는 육체적으로는 앞을 볼 수 있지만 제가 상상을 했을 때 영적으로 타락한 곳으로 가서 또 다시 육체의 눈이 아닌 영안이 눈먼 사람이 될 환경에 처할 수 있기에 가지 마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이 사람은 실제 육체의 눈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급선무이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그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이 머는 걸 더 염려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육체의 눈은 물론 기적으로라도 치유할 수 있지만 어쩌면 영안이 막혀 있다면 그건 엄청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육체의 눈도 회복이 되니 뚜렷하게 보일 수 있듯이 영안이 막혀 있으면 천상의 세계에 관한 말씀이라든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올 수 없을 겁니다. 영안이라는 게 꼭 눈만 상징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귀도 상징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면 십계명에도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하는 계명을 보고 그럼 남의 남편은 탐내도 된다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눈을 고쳐주셨지만 영안을 더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합니다. 눈을 통해서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도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영안이 막혀 있으면 우리의 마음에 빛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의 속성이 들어올 수 없게 되리라고 봅니다. 막혀 있기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들어오시려고 하려면 영안을 막게하는 것을 청소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제가 오전 미사를 가기 위해 씻고 준비를 하면서 옷을 갈아입는데 빨래 건조대에 있는 상의의 옷을 입을 때 봤습니다. 세탁을 하고 말린 옷인데도 먼지는 아니겠지만 섬유유연제를 통해 세탁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세한 게 떨어지는 걸 창의 빛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거울에 사르르 내려앉는 걸 보면서 미리 복음을 봤기 때문에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녁에 돌아와서 거울을 한번 딲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럴 겁니다.

 

거울에 쌓인 그런 미세한 먼지도 처음에는 미세하게 쌓이겠지만 나중에는 계속 쌓이고 쌓이면 수북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 먼지처럼 평소에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게 하는 더러운 때가 조금씩 이 먼지처럼 쌓여 있다고 생각을 하면 참으로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시커먼지는 잘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먼지는 보이지만 마음속에 있는 죄의 얼룩은 잘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걸 볼 수 있는 눈이 영안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눈과 마음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을 겁니다. 마음이 혼탁하면 그에 따라 눈도 혼탁할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많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보자면 저는 신심을 언급하는 부분을 좀 더 집중적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이라고 독서는 말을 합니다. 말의 중요성을 언급한 내용입니다. 결국은 때로는 말이 자신의 신심마저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강조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이 되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주고 무엇보다도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면 바로 뭔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뚜렷한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눈을 가지지 않으면 오염이 되도 구분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오염원으로부터 지킬 수가 없는 것일 것입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오늘 복음 마지막 내용인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는 말씀이 제 귀에는 이렇게 들립니다. “저 마을로 들어가면 세상에 물드니 가지 말거라이런 의미로 제 마음속에는 메아리치는 것 같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길이 바로 거룩해지는 길인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해지려고 하는 첫 단계가 거룩함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따르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것이 아닌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는 길이 거룩해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종이 되는 것이 거룩해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끝으로 거룩하려면 겸손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이렇게 해야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간혹 원래 인간은 나약하니까 조금은 마음이 혼탁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경향이 있는데 설사 나약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자위로 자신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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