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자유게시판

<詩人 金素月의 문학과 생애>

스크랩 인쇄

이도희 [edohyy] 쪽지 캡슐

2020-04-01 ㅣ No.219956

<詩人 김소월(金素月)의 문학과 생애>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 화자를 통해 보여주었고,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노래하였다.

 

아버지 성도(性燾)와 어머니 장경숙(張景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에서 태어나 백일이 지난 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 본댁으로 돌아왔다. 2세 때 아버지가 철도를 설치하던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이 되자 할아버지가 그를 돌보았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숙모 계희영에게 심청전·장화홍련전등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1915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 1916년에는 홍단실과 결혼했다  

3·1운동 직후 오산학교가 잠시 문을 닫게 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만식이 교장, 서춘·이돈화·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4진달래 꽃의 무대인 영변을 잠깐 다녀왔다.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다.

 

광산일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32세 때 곽산에서 음독자살했다. 19683월 한국일보사에서 남산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그의 詩문학의 낱말구사의 특징 

19202창조낭인(浪人)의 봄·()의 우적(雨滴)·그리워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뒤, 같은 해 먼 후일·만나려는 심사(心思)(학생계, 7월호)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한 뒤부터이며, 주로 개벽·영대를 무대로 했다.

그의 는 단어와 단어를 묶고, 행과 행을 고도의 긴장관계로 엮은 한국의 전통적인 음수율과 음보율을 밝히는 데에 제일 좋은 운율학의 자료로 쓰이고 있다.  

그의 시는 애용하는 단어가 어떤 전후 문맥에 걸려 어떤 의미들이 조절을 받는가를 시험해보는 장소 같은 느낌도 준다. 1925 개벽 5월호에 발표한 '음영(陰影) 시학'이라고도 하는 시론 시혼 詩魂에서 어둡고 가냘프고 애잔하게 투영되는 시가 소중하며평범하고 습관적인 행위 속에서 '() 정체(正體)' 발견할  있다고 했다

 

그가 한국시사의 하나의 원형질적인 존재로 평가받고 있는 점은 가장'평범한언어로 '비범한시적 조직을 만들어 충격적인 반응을 얻어냈다는 점이다.그는 '··바다··저녁' 같은 ·공간을 나타내는 단어와 ''이라는 주체어그리고 '그립다·가다·오다·설움·슬픔' 같은 동작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위의 단어들이 인간의 삶에 가까운 것이고 보면그의 시인으로서의 능력은 '별난시어의 선택이 아닌 '별난배합과 조직에 있다고 하겠다  

단어와 단어를 묶고행과 행을 고도의 긴장관계로 엮은 그의 시는 한국의 전통적인 음수율과 음보율을 밝히는 데에 제일 좋은 운율학의 자료로 쓰이고 있다. 

 

<金素月에 대한 평가  

그는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한은 순종과 미련이 교차하는 데서 기다림을 갖게 하고, 그 기다림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좌절과 미련이 서로 마주치는 과정에서 처절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죽은 이의 혼을 불러 다시 살리겠다는 염원에서 비롯된 초혼은 이런 처절한 슬픔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한을 읊게 된 요인은 먼저 아버지가 정신이상자라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가정적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이 항상 소외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정신이상자라는 데서 오는 열등감과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도 한의 생성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가 여성적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기에 포함된 한 역시 주위의 불행한 여성들의 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어머니, 숙모 계희영, 외숙모, 친구 김상섭의 아내 등은 그에게 있어 불행한 여인으로 비쳤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절망감과 허무의식도 한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기에 쓴 시를 보면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에서 나아가 민족감정에 눈뜬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돈과 밥과 맘과 들, 그리고 조만식의 민족혼을 읊은 제이··에쓰등이 그 예이다.

 

글옮긴이~이도희(아오스딩)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162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