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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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도대체 누구냐 (로마 4: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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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9-18 ㅣ No.140852

 

(공동번역성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로마서 4:23-25)

23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는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만을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 24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들까지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에릭 프롬은, 신이 죽고, 아버지가 죽은,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 인간은 모두, 죽었다고 인정해야 한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이 의지할 대상은 신이었고, 아버지였는데, 인간들의 되기 프로젝트, 가부장 되기 프로젝트에 의해서, 신이 죽고, 아버지가 죽었다는 거예요. 이제 의지할 대상을 잃은 거예요. 인간은요!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의지(依持)할 대상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믿을 것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 자기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류의 죽음이라고 에릭 프롬이 외쳤죠. 물론 에릭 프롬이 복음(福音)을 근거로 해서, 역사를 해석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련의 그 역사 내러티브를 이렇게 바라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성경이 예언(豫言)한 역사 흐름의 지향성(指向性), 인간의 결국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實現)되어가고 있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죠? 에덴동산에서의 그 죄()가 뭐였습니까? 권위(權威)를 타고 넘는 거였잖아요? 그게 역사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지고 있는 거죠. 신을 쫓아내고, 아버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신을 잃고, 아버지를 잃은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모든 관심을, ‘라는 존재 안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그건 에릭 프롬의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된, 인류의 일관된 성향(性向)이며 실체(實體)인 거예요. 그렇게 밖으로부터의 그 어떠한 압제도, 권위도, 통제(統制), 허락하지 않는 선악과 입에 문 아담들은, 자기 자신 안으로 숨어들게 되고, 자신의 심층 심리와, 본능적 충동에, 충실한 노예가 되는 거요. ? 내가 하느님이니까.

 

그렇게 흙인 자아 속에 갇혀버리는 상태를, 땅에 갇힌 상태! 그래서 지옥(地獄)’이에요. 그래서 나만 위해 사는 거, 인간을 높이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바로 지옥인 거예요. 그렇게 외부의 압제(壓制)와 권위와 통제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이겼다라고 생각하는 역사 속 아담들은, 자유(自由)라는 전리품을 마음껏 향유하죠.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하느님이 주시는 하늘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들이 조합(組合)하고 정의하고 구축(構築)하고, 상정(想定), 자신 섬기기의 자유예요. 자아 섬기기의 자유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의 뜻을 따라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거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내 천국! 내 구원! 내 상!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방종(放縱)입니다.

그렇게 자기 밖의 상위 권위인 신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인간들은, 그 외의 다른 모든 권위들을, 살해하는 인생을 살아요. 이제 좀비들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인간들의 가지고자 하는 무한 추구는, 신의 뜻이다!’ 막스 베버가 한 이야기죠? 인간들이 뭔가를 가지고자 하는 이 욕망(慾望), 뜻은, 이 무한 추구는, 끝이 없어요. 이 무한 추구는, 곧 신의 뜻이다. 이게 근대 자본주의의 근간(根幹)이란 말이에요. 핵심이라 말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란 말예요. 그것이요! 그런 말까지 서슴없이 해 내는, 그런 인간들이 된 거요. 다른 말로, 내가 신이다.’라는 말이에요. 내 뜻이 곧 신의 뜻이다.’라는 말이니까.

얼마 전에, 일본에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덮쳐서, 아비규환의 지옥이 되었을 때, 전 세계, 특히 한국의 전자업계와 자동차업계가 쾌재를 불렀죠? ‘한 번 더 흔들어야 되는데이런 말까지 나왔어요. 애플의 수장 스티브 잡스가 죽자, 애플과 경쟁관계에 있던 IT업계의 주가가, 급상승했습니다. LG와 삼성이 나누었습니다. 증권시장의 독수리눈인 기관투자자들이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것이죠. 지구 한 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약회사의 상품 판매량과 주가가 폭등하고요. 자연재해로 도시가 망가지면, 중장비업계가 호황을 누립니다. 요즈음은 코로나-19로 마스크업계와 제약회사가 호황을 누리지요?

 

그렇게 이 세상의 아담들은, 나 이외의, 타자의 피를 먹고 살아요. 타자의 시체 앞에서, 손익계산을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논리개발을 하고, 시나리오 작성을 하죠. 가상 시나리오 작성을 한다 말이죠. 심지어 타인의 피가 많이 흐를수록, 나의 이익이 늘어난다는 손익계산이 끝나면, 그 때부터, 그 마음속에 바램이 생깁니다. ‘더 많이 죽어줘! 더 많이 피를 흘려줘!’라는 기도가 나온다 말이죠. 그게 인간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녜요. 바로, 역사 속의 나의 실체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나의 실체(實體), 그 처음 자리를, 올바로 알아가야 하는 거요.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에 나오는 그 유명한 문장,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넌 유대인이야? 독일인이야?’ 그러죠. ‘넌 도대체 누구야?’ 그런데 그 사람도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나중에 잊어버려요. ‘내가 누구야?’ 여러분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올바로 하실 수 있습니까? 이 대답을 올바로 하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적지거든요. 도대체 여러분의 정체가 뭐예요?

 

오늘 본문은, 우리 성도의 정체를, ‘예수님이 죽으셔야 할 만큼, 불가능하고 추악한 죄인(罪人)’이라고 정의를 내려줍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되요. 사실 424절까지에서 그 설명을 완료(完了)하고 있어요. 25절은 총정리를 하는 구절이에요. 유대인들의 그 율법과 할례라는 그 행위를 갖고,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예로 들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사는 것이다.’라는 걸 설명한 사도 바오로가, 25절 마지막 절에서, 그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하고 있는 거요.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을 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를 넘겨줬고, 우리의 , 예수를 높이 들어 올렸다.’예요. 사뭇 다르죠? 이게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를 넘겨주었고, ‘파라디도미!’ 하느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줬다 할 때 쓰는 단어예요. 넘겨주었고, 우리의 ()’가 예수를 높이 들어올렸다. ‘찬송했다라는 뜻이에요. 단순하게 예수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살아나셨다가 아니라 말입니다. 왜 용서하기 위해 살아나야 돼요? 논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함부로 추측하지 말란 말입니다.

25절의 현실은, 이미 묵시 속에서 벌어진 현실이기도 하고, 지금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천국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거요. 그걸 조금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성도는, 원래 처음 자리가, 먼지, 아다마예요, ‘아파르, 아다마, 입니다. ‘없음이에요. 그 상태는, 혼돈(formless)이고, 공허(emptiness),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는 거! 그러니까 없음이란 말입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 하느님의 영, 생기, ‘르와흐, 덮음의 은혜, ‘라하프로 이렇게 가입을 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없음들은, ‘존재, ‘있음으로 탄생을 하게 되는 거, 이게 하느님나라 백성들, 하느님 나라 존재들의 탄생원리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없음들이, 원래 나 있었음의 그 흉내를 내기 시작할 때, 그걸 라고 하지요. 하마르티아!’ 그 죄는, 라는 존재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에, 나 밖의 모든 상위 권세들을, 살해하기 시작해요. ? 내가 왕이 되고, 내가 하느님이 되어야하기 때문에, 내 위의 상위 권세는 반드시 살해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급기야 니체처럼, ‘까지도 살해하기에 이르게 되는 거요. 니체의 가장 핵심 사상이 뭐예요? ‘초인사상이에요. 인간이 강하다! 그러니까 신은 죽어야 되는 거요. 신을 살해(殺害)한다는 건, 나를 만드신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을 뭐 어떻게 가서 죽이겠어요. 신을 살해한다는 건, 하느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 말은 다른 말로, 창조주 앞에서 나의 처음 자리를, ‘먼지, 으로 자각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게 신을 살해하는 거요. 왜냐하면 그 창조주, 창조라는 말 자체가, ‘없음이라는 존재를 가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는 단어란 말이에요. 그래서 창조주 앞에서, 내가 있음의 흉내를 낼 때, 그것이 창조주를 무시하는 거고, 이게 살해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렇게 없음에 불과한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창조주를 살해하는 걸, 이해하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 준 게, 창조주 하느님이신 예수의, ‘십자가 지심이란 말이에요. 자기들의 있음의 흉내! ‘우리도 잘 지켜, 우리도 착하게 살아이걸 지켜 내기 위해, 자기들의 제사를 지켜내기 위해, 창조주를, 내 상위 권위자인, 그 창조주를 죽여 버리는 거예요. 살해해버리는 거예요.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 때문에 죽으셨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라도떼에, 넘겨주다라는 의미의 파라디도미의 수동태예요.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의 죄에 의해예요, 우리를 위해서가 아녜요. 정확히 번역하면 그 전치사는, ‘죄에 의해서란 말예요. 죄에 의해서, 쫓겨난 거예요. 넘겨진 거예요. 우리의 죄는, 그렇게 하느님을 쫓아내는 거, 넘겨버리는 거란 말예요. 십자가에! 그게 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들의, 하느님 살해 사건이란 말예요.

그런데, 바오로가 11절에서부터 424절까지에서, 집요하게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하느님이 준비하신 하느님의 ()’, 예수를 살해한 죄인들 위로 덮히고, 부어지게 되는 거요. 은혜가! 그렇게 해서 죄인들이, 의인(義人)으로 여겨지게 되는 거예요. 로기조마이!’ 여겨지게 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현실이, 성취가 되는 거예요.

그것을 자각(自覺)하게 된 의인들이, 무엇을 하게 되는가? 그렇게 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겨진 자들이, 무엇을 하겠어요? 예수를 높이잖아요? 25절이 정확히 그 뜻이란 말예요.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저 의롭게 되자, 그 의인들이 의(), 예수를 높이는 거예요. 수동태란 말이에요. 그것도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25절 한 절에, 에페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의 현실이, 모두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죄의 그 하느님 살해(殺害)! 내어줌, 우리 , 하느님이 선물해 주신 그의 예수님! ‘높임,’ 예수님 찬송!’ 그 사이에, 십자가가 떡하니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죄는, 끊임없이 상위 권위를 살해하려 하고, ‘()’는 끊임없이 예수만 높이는 작업을 해요.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모르고, 나를 찬양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구원자이신 예수를 쫓아내며 살해하려고 할 때에, 우리 안에 그 성향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럴 때에,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나! ‘를 죽이시고, 예수만 찬양받게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나를 절대 찬양하고 자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요.

그런데 이 두 양상이 우리의 자아 속에서, ()히 일어나고 있다 말입니다. 나를 끊임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데, 그러한 나의 실체 자각을 통해, 십자가가 감지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그 있음의 흉내가 죽어가고, 예수의 공로만을 찬송(讚頌)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 창조되는 거요. 그것을 신학에서, ‘생성론적(生成論的) 교회라고 불러요. 여러분 신학들 좋아하시죠?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신학(神學)과 교리(敎理)가 예수를 죽였습니다. 세리와 창녀가 죽였어요? 신학을 유일하게 갖고 있던 바리사인과 사두가인들이 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엉터리 신학이, 예수를 죽여요. 하느님을 못 알아먹게 만든다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성론적 교회로,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거예요.

 

교회가 이 역사 속에서, 생성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완료되어 있는, 묵시(默示) 속 교회의 현실을, 역사 속에서 차근차근 깨달아 간다는 의미로서의, 생성론적 교회라는 뜻이에요. 그러한 생성론적 교회의 현실(現實),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낡아지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디아프테이로철저하게 부패(腐敗)되다, 철저하게 썩다, 철저하게 파괴되다란 뜻이에요. 철저하게 파괴되다! 우리의 겉 사람, 즉 하느님과 관계없이, 규정되고 정의된 그 나! 라는 자아(自我), 매일 매일 철저하게 부패되어 사라지고 파괴된다는 뜻이에요. 이걸 자기부인이라 그러죠? 성숙시키고, 변화시켜내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철저하게 부패되고, 파괴(破壞)되는 거예요.

그런데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그러죠? 속사람이 뭐예요? 내 안의 사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고 라는 존재와 완전히 상관없는, 그런 타자로서의 그 예수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라는 존재의 삶에 깊이 개입을 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합(聯合)이 되어서, 나의 그 겉사람의 처음 자리를 폭로해 내면서, 예수가 이끌어 가시는 새사람의 실체를 깨닫게 하시는, 나와 관계하시는 예수! 그게 속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내 삶에 개입하셔서,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신앙하지 못할 자로 드러내는 거요. 이게, 죄의 확인이란 말예요. 사도 바오로가 자기를 죄인 중에 죄인으로 결론짓고 죽은 것처럼, 그 자리로 밀려가는 거란 말입니다. 이게 겉사람의 파괴! 겉사람의 자가부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겉사람이 자기를부인하면, 당연히 성도가 붙들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가 부각(浮刻)이 되겠죠? 내가 믿을 건 십자가 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속사람이, 예수가 새로워진다, 강건(强健)해진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굳이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속사람을 벗는 게 아니다.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걸 벗는 게 아니라, 착하게 열심히 살아서, 이거 더러운 거 벗는 게 아니라, 즉 옛 사람을 벗는 게 아니라, 새 사람을 덧입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성론적 교회의 모습이에요.

(로마서 7:21-24)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바오로 안에도 두 가지 모습이 다 나타나고 있어요. 내 안에 분명히 예수가 계신데, 사망의 몸이라는 게 공존하고 있어요. 이렇게 바오로는, 사도로 일하는 중에도, 자신의 겉 사람의 실체를 수시로 폭로 당하는 삶을 살았어요. 자기는 절대 신뢰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도록 하느님의 은혜가 그를, 끌어갔단 말이에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계속 쫓아내 버렸어요. 하느님이요

그리고 유대 문헌을 보면, 생긴 것도 너무 못 생겼어요. 이 사람은요! 머리도 무지하게 크고, 대머리에다가 메부리코! 그리고 짝다리였어요. 오다리! 유대 사가들이 기록한 사도 바오로의 모습이에요. 거기에다가 말도 어눌하다 그러고, 사람들이 심지어 자기가 개척한 교회 교인들이, 그의 도덕성을 자꾸 들먹였어요. 왜 남의 자리, 남의 범위, 남의 한계를 침범하느냐? 이렇게! 거기에다가 육체의 가시라는 걸 줬는데, 이걸 단순히 간질이나, 안질, 이런 질병으로만 생각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의 외양! 겉모습! 사람들에게 평가되는 겉모습이 형편없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왜 하느님이 그렇게 놔 두느냐고요? 가시 스콜롭스라니까요.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하느님, 이것 좀 제발!’ 이것 좀 제해달라고, ‘스콜롭스를 제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이거는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했다는 뜻이라 그랬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 번은!

스콜롭스, 전쟁 포로들을 데려다가, 1미터, 2미터 되는 쇠꼬챙이로, 옆구리를 찔러서, 끌고 다니던, 그 쇠꼬챙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거 꽂아놔 뒀다니까요. 죽을 때까지!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어요? ‘그거나 먼저 빼, 나에게 복음이니 뭐니, 이딴 것 이야기하기 전에! , 그거 꼴 보기 싫으니, 그거나 먼저 빼그런데 하느님이 안 빼줬단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놔두시는 거예요. ? 일은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네 안에 있는 내가 하는 거라는 걸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사역 반 이상이 감옥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감옥에 있는데, 밖에서 뭐 시기 질투해서 사람들이 복음 전해! 친구들이 복음 전해!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되어져 가고 있어. 일이! 그 상태에서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로마서 7,25)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어디로 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간단 말이에요. 내가 이 사망의 몸,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사망의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데, 길이 생겼어요. 벗어날 길이 생겼는데 그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할 수밖에 없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성도는, 자기의 겉 사람의 실체가 깨달아지면 깨달아질수록, 자신은 절대 신뢰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돼요.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로 가지요.

우리가 기대하는 건, 이제 그렇게 ! 예수가 우리를 구원한 거구나!’ 이걸 깨달았으면, 사도 바오로가 그래서 이제는 마음으로도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도 하느님의 법을 섬긴다!’로 끝내야 되는데, 이렇게 예수께 감사한다. 그래놓고 마지막을 그러나로 또 반전을 일으킨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래서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구나!’ 그러고 돌아가신 거예요. 그게 바로 생성론적 교회의 모습인 거예요.

 

우리는 이 육신을 입고 있는 한, 계속해서, 우리 육신의 한계와 실체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거고, 그 속에서 홀로 선()을 이루고 계신 예수의 열심 앞에, 항복(降伏)하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성화의 어떤 수준에 올라가서, ‘, 나는 이제 거의 완전 성화에 가까웠기 때문에, 죄짓는 게 너무 힘들어!’ 그러면 뭐 하러 그거 새 옷으로 바꿔줍니까? 그냥 입고 천국 보내지. 왜 바꿔주느냐고요? 이 걸요, ?

(열왕기하 19:31) 31 살아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난을 피한 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열성을 부어 이 일을 이루시리라.'

하느님의 열심이 이루는 거예요. 우리의 열심이 거기에 가입될 수 없다 말입니다. 그렇게 라는 존재는, 예수라는 신랑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이 되어서, 그 분에 의해 끌려가는 순종의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게, 성도의 신앙여정(信仰旅程)이에요. 그것을 사도 바오로가 질그릇 속의 보물이라는, 아주 명쾌한 그림으로 설명해주죠.

(고린도후서 4:7) 7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의 우리의 실체 넌 누구냐?’ 하면, ‘나는 질그릇입니다.’라고 대답해야 돼요. ? 하느님의, 예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질그릇이 되어야 돼요. 이게 바오로 신학의 백미(白眉), ‘약할 때 강함 되시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보배는, 예수예요. 그런데 그 예수를 담고 있는 그릇이, 질그릇이래요. 질그릇이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 ‘오스트라키노이 스큐네이스는 직역을 하면, 흙으로 만든 신부라는 뜻이에요. 재미있죠? 흙으로 만든 신부! 깨지기 쉬운 신부라는 뜻이에요. 신부 중에서도 신랑에게 완전하게 순종하는 신부를, ‘스큐어스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질그릇은, 신랑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은 언제든지 깨어짐을 감수하며, ‘없음, 그 흙의 자리에서, 신랑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 순종하는 신부로 사는 여자를 말해요. 그게 질그릇이에요.

 

순종이 뭡니까? 내 뜻과 내 의지가, 신랑의 뜻 앞에서, 꺾이고 부수어지는 걸 말하죠.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그것도, 완전하게 꺾이고, 부서지는 거! 그런데 신부인 교회의 신랑은, 예수라는 완전한 분이에요. 그래서 그 예수라는 그 신랑에 의해 끌려가는 삶은, 겉으로 볼 때,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다 선()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어요.

좀 더 제가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그릇의 정체성은, 무얼 담는 가에 있어요. 그 내용에 의해서 결정이 되죠. 밥그릇은 밥을 담는 그릇이고, 국그릇은 국을 담는 그릇입니다. 요강은 배설물을 담는 그릇이고, 보석함은 보석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 그릇의 자격과 됨됨이와 조건은, 그의 정체성 확립에 아무런 기여를 못해요. 그릇은! 주인이 아무리 화려한 그릇도, 주인이 요강으로 쓰면, 요강이 되는 거예요. 주인이 거기에 무엇을 담느냐에 의해, 그 그릇의 정체성이 결정이 되죠.

따라서 그릇의 기능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영광을 위해 쓰이고 소모되어지는 것이어야지, 그릇의 가치, 그릇 자체의 가치나, 위상 확립에 있는 게 아녜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이 되면, 그릇은,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어떻게 훼손이 되어도, 어떻게 평가를 받아도, 두렵지 않아요. 불쾌하지 않아요. 내 안에 들어 있는 그 내용물이, 그 가치와 영광을 인정받으면 그만이에요. 그것이 바로 생성론적 교회라는 거예요. 나는 계속 낡아지고, 내 안의 예수의 은혜만이 더욱 더 빛이 나게 되는, 그런 과정 속에 있는 이들을, 생성론적 교회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질그릇 됨의 자아 인식 속에 있는 이들은, 점점 자신의 차장이나, 겉모습, 외모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도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던 거예요. 두려워한다는 건, 내가 주인공이거든요. 내 안에 담긴 보석이 주인공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모습이 왜 이래?’ 두려워하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떱니까? 하느님은 한 번 택한 자들은, 끝까지 끌고 가신다면서요? Perseverance of the Saints! 견인! 자기가 해 놓은 일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고,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두려워 떠는 거죠. 쉬운 말로, 질그릇의 업적(業績)과 공로(功勞)를 열심히 만들어 놓고, 그게 못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서 두려워 떨어요. 이 그릇을 열심히 닦고 치장해서, 이 정도면 됐나? 하고 봤더니, 옆에 멋진 도자기가 딱 있네. 그러면 이내, ‘그럼 난 뭐야?’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두려움이죠.

하느님은, 질그릇 안의 보석이신 예수를 보세요. 여러분, 이 겉사람, 이 껍데기 안의 예수를 보신다고요. 너 얼마만큼 변화되어서 왔어?’가 아니라, ‘네 안에 예수 있어?’를 물으신다니까요. 그리고 그 껍데기를 불에다 태워버리는 게,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라 말입니다. 예수만 남기고!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이 보신다고 하는 보석에는 관심이 없고, 열심히 질그릇 된 자신의 치장에 열을 올리면서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릇이! 그릇인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그릇에 흠이 가거나, 그릇의 균형이 맞지 않거나, 그래서 칠이 잘못 됐거나, 그릇에 뭐가 묻거나 하면,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라요. 그게, 그릇의 원래 기능을 상실하고 잊어버린, 엉터리 그릇의 모습이에요

그릇의 용도는, 내용을 담는 거예요. 자기들이 스스로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이건 선이고, 저건 악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해버리고, 스스로 두려워하면서, 때로는 스스로 기특해 한다고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보편적 죄성(罪性)’이라는 거요.  그 그릇의 원래 목적이, 전시용이라면, 흠이 있고 균형이 안 맞는 그릇은, 깨버리는 게 맞아요. 그리고 열심히 닦고 치장을 해서, 예쁜 작품이 되는 게 맞다고요. 그런데 성경은, 그 그릇의 목적을, 전시가 아니라, 단지라고 이야기 한다 말예요. 보석을 담는 단지! 그렇다면, 그릇에 조금 흠이 있어도 조금 균형이 안 맞아도, 그 안에 담을 것만 확실하게 담고 있으면, 그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그릇인 거예요. 그게 바로 외모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성도의, 올바른 자아인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쓰셨던 그릇들이, 하나같이 좀 모자랐던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솔로몬, 다윗, 바오로. 왜 그런 살인자들, 갑옷도 안 맞는 어린애, 함부로 남의 아내를 겁탈한 자! 뭐 이런 사람들을 들어 쓰냐고요? 이왕이면 스테파노 같은 사람. 보기만해서 광명한 천사 같은 그런 사람! 오래 좀 살려두고, 두고두고 쓰시지. 왜 설교 한 번 하고 죽이느냐고요? 일은 하느님이 하는 거라니까요.

 

로 다윗 같은 사람, 물맷돌 다섯 개로 아무도 대항할 수 없었던,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였다고요. 다윗이 잘 던진 건가요? 고 위에 뭐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수시로, 곰과 사자 늑대에게 돌 던져서, 잡기도 하고, 쫓기도 했다 그랬죠? 다윗은 갑옷도 안 입고, 똑같이 일상의 돌을 던졌는데, 하느님이 다윗이 하는 그 일상(日常)의 일! 거기에 표적(標的)으로, 골리앗의 대가리를 딱 잡고 옮겨가서, 맞춰준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위에 붙어 있는 거예요. 다윗은 일상의 일을 했는데, 하느님이 죽였다는 뜻이에요. 그게 보석을 담은 그릇이라니깐요. 그런데 무슨 상을 받겠다는 거예요?

신앙생활이라는 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자기 자신까지도 판단을 하며,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라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아담들의 그 선악판단의 선악판단권이 차압(差押)을 당하는 과정이에요. 왜 가난한 게 잘못된 거죠? 이 시대는 가난한 게 악()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가난해지면, 절망(絶望)하는 것 아닙니까? 악이니까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판단한 거거든요. 지금. 가난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그죠? 왜 부자가 선()입니까? 왜 병 걸리는 게 악이죠? 왜 건강한 게 선이냐고요? 누가 결정했나요? 그 걸요?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결정해 놓은 거 아닙니까?

그 선악판단이 하느님께 차압당할 때, 여러분은 가난해도 괜찮고, 병 걸려도 괜찮은 거예요. 이걸 천국이란 하는 거예요. 선악판단의 주체권을 하느님에게 넘겨드리는 거란 말입니다. 상황과 사건이 변화되는 게 아니라, 내 선악판단의 능력, 선악과 따먹고 얻어버린, 도둑질해 탈취(盜取)해 버리는 능력을 하느님에게 빼앗기는 거, 이걸 구원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그 선악판단을 내가 해서 그 율법을 잘 지키고, 하느님 말씀 잘 지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판단은 누가 내린 거냐고요? 도대체.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라, 십자가를 믿으라 하잖아요?

(창세기 3:17-19) 17 그리고 아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 먹지 말라고 내가 일찍이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18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19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 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

여러분, 이게 은혜의 언약이에요. ‘,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리라가 저주인 줄 아셨죠? 이 역사가 내어놓는 모든 건, 가시덤불과 엉겅퀴예요. 원래, 흙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산을 내어놓을 수 없는 존재죠?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따먹고 해보겠다고 나선 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그래, 그럼 땅을 갖고 만들어 보라고 하신 거예요. 열심히 만들어 보라는 거예요. 땀을 흘릴 거야. 힘들 거야! 그러나 만들어라.’ 열심히 만들었어요. 스티브 잡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만들었는데, 하느님이 안 받는대! ‘아이폰 5, 이거 안 받아요? 내가 갖고 왔는데? 아무에게도 안 알려줬는데, 부사장에게도 안 알려줬는데, 이것도 안 받아요?’ ‘안 받아!’

 

그 때 성도는 , 안 받는구나, 그럼 난 어디로 들어가야지? ! 흙이 되어서,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 앞에 서야, 나는 사는 거지!’로 가잖아요? 그러니까 만들어라!’ 해 놓고, ‘너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살리겠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즉시 다음 절에서 아담이,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 거예요. ‘우리는 산댄다.’ 산자의 어미!

(창세기 3:20-21) 20 아담은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산자의 어미)라 해서 하와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21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이거예요. 하느님이 덮으시는 거! 우리는 흙이 되는 거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원래의 자리, 흙의 자리로 내려 보내시는 것이, 구원이라는 걸, 창세기 3장이 벌써,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가죽옷 사건!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벌써 여기에 힌트 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사도 바오로가 골로사이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골로사이서 3:1-3) 1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2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 거듭난 자는, 위의 것을 찾으라, 그래요. 그리고 그 위의 것의 내용이 뭐라 그래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는 그것! 그게 위의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란 말예요. 그리고는 땅의 것을 버리라고 하죠. 땅의 것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율법과 그 율법의 열매를 이야기 하는 거요. 뭐 욕심 부리고, 탐욕 부리고, 이거 아니고, 율법과 율법의 열매! 행위들!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버리라 그래요. 그리고 3절에서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는데, 그 이유가, ‘너희는 죽었기 때문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은 자들이 뭘 만들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인 거예요. 우리는 질그릇! 흙이라는 거예요. ! 그래서 죽여 버린 거예요. 흙으로 만들기 위해서. 죽여서 흙으로 보내기 위해. 그렇게 죽어서 이미 하늘에 앉아 계신 예수님 안에 앉아 있는, 우리, 성도(聖徒)! 이게 우리의 실체(實體)예요. 그게 우리의 현실(現實)이라니까요. 그런데 왜 이 땅의 육신과, 이 역사의 자원으로, 땅의 것을 만들어서, 하늘에 오르려고 하느냐라는 일갈(一喝)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교는, 이 땅에서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선행을 실천하여, 훌륭한 자, 강한 자가 되는 게, 그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건 석가가, 간디가, 라지니쉬가 본 성경관이에요. 부처가 성경을 보면, 어떻게 보겠어요?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고, 이웃을 섬겨, 너의 이 이후의 삶을 유익한 것으로, 보다 나은 것으로 쟁취해 내어라가 석가의 가르침이죠?

생각을 해보란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의 대척점에서, 우리를 원수 취급한다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지와, 라지니쉬나 석가나, 간디가, 슈바이처가 추구했던 그것이, 어떻게 성도와 추구하는 것이 될 수 있느냐고요? 어떻게? 원수라며, 대척점에 있다며요, 어떻게 교집합이 생기느냐고요? 남이 써 놓은 책이나 주석서나 이딴 거 보고, 함부로 자기 것 정리하지 말고, 생각을 하시라니까요.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거고, 내칠 거라고 했지, 똑같은 목적지를 두고, 누가 먼저 그 목적을 성취하고 달성하나 내기하는, 그런 사회라고 말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은, 세상이 인식(認識)하고 이해(理解)하는, 간디가 적어도, 산상수훈을 이해한 것과, 우리가 이해한 것은 달라야 하잖아요? 성도가 보는 성경과, 성도 아닌 이가 보는 성경이 달라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러한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의 그 표피적 의미 말고, 더 융숭 깊은 메시지가 있다는 증거이겠죠, 그죠? 그게 뭐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에, 수많은 도덕적 윤리적 명령들을 내려놓은 걸까요? 사랑해라! 용서해라! 인내해라! 이웃을 섬겨라!

 

여러분 율법의 기능이 뭐라 그랬어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하는 蒙學선생이라 그랬죠? 그래서 선악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인간이 따먹는 죄를 짓는 거라고요. ‘죄인이구나!’라고 드러났잖아요? 율법의 원시 모형이 선악과니까, 먹지 말아라! 선악과는 여자가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거였어요. 그걸 따먹었다는 건, 내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자가 되겠다는 거죠. 그래서 그거 먹은 거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요구(要求)하시는 건, 여자가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열매여야 돼요.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느님 홀로 없음에서, 혼돈과 공허에서 만들고, ‘, 참 보기 좋다한 그거란 말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홀로 찬양받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성도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보기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을 마구 만들어 내놓고, 하느님은, 그걸,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걸로 바꿔내는 게 신앙생활이란 말이에요. 이 두 가지가 성도의 인생에 공히 나타난다니까요. 그걸 새 창조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에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똑같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선악과를 던지세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따먹으라고 주신 과일인 것처럼!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 알라고 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덕과 윤리의 명령 또한, 따먹으라고 주신 게 맞아요. 하지 말라는 게 아녜요. 열심히 하세요. 열심히 지키세요. 그래서 보람도 느끼세요. 제발!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 훌륭한 평판(評判)! 다 좀 챙겨 보세요. 뭘 해봐야 그게 허무(虛無)하다는 걸 알지, 해 보지도 않고, 말로만 허무하다고, 뭐가 허무해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말로 만 죄인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죄인이래, 웃으면서. 순 사기꾼들이에요. 내가 죄인인데, 웃음이 나옵니까? 천만의 말씀. 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이 시대가 무슨 죄를 알아요? 뭘 하느님을 압니까? 이 시대가!

 

예수님이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 ‘성전이 우리를 덮는다.’라는 뜻이라 그랬어요? 그게 요한묵시록에서도 장막이 우리를, 교회를 덮죠? 똑같은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성전이 내려와서 너희를 덮는 게 구원이지, 네가 여기서 계단 쌓아 올라가는 게 구원이 아니라는 걸, 광야에서 설명해 준 거예요. 이게, 우리의 인생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가 광야인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러는 거예요. ‘여기가, 이게 성전이구나!’ 하느님의 성전! 예수! 여러분! 성전! ‘하느님나라가 완성 되는 건, 이런 형국으로 완성이 되는구나!’를 알고, 거기를 벧엘, ‘하느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이 세상의 자원으로, 하늘에 닿기 위해, 야곱처럼,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아올렸던 계단이 있었죠? 뭐였어요? ‘계단쌓아올리다에서 나온 단어란 말이에요. 그게 바벨탑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거기도 스테어웨이(stairway)가 나오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거 때려 부쉈잖아요? 인간들이 하늘에 닿기 위해서 돌과 진흙이 아닌, 역청과 벽돌이라는 문명의 산물들을 이용해서, 계단을 쌓아 올라간다 말입니다. 이게 역사예요. 그 때 한 번 있고만 게 아니라, 이게 전체 역사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탑이고, 요한묵시록에서는 이 세상 전체를 바벨론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걸 부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에 오르는 계단 쌓기 경연장인 이 세상을, 하느님이 부수지 않고 놔두세요. 그냥 놔두세요. 그리고 유독 당신의 백성들의 바벨탑 쌓기만 부수세요. 요걸 고난(苦難)’이라 그래요.

 

애굽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어요. 전부 다에. ‘하늘로 향한 계단은, 그를 위해서 (물론 왕이죠.) 만들어졌다. 계단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기 위해서!’ 애굽 사람들은 이 피라미드를, 스테어웨이(stairway)라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에 이르기 위해, 인간의 힘으로 쌓은 계단! 그게 피라미드입니다.

지금도 인류가 세계 최대의 건조물로 칭송되는, 애굽의 피라미드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700년 전, BC 2700년에 만들어진 거예요. 아브라함과 롯이, 그 어마어마한 피라미드가 있는 애굽에 갔다 온 거예요. 그래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보면서, ‘! 애굽 같다!’ 그런 거예요. 지금도 피라미드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입이 딱 벌어지는데, 아브라함과 롯이 그 땅을 갔다 왔다니까요.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m이고요. 밑변의 길이가 230m나 되는 거대한 석조건물이에요. 이걸 쌓아올리는데 필요한, 석회석이, 268만 개예요. 전체 무게가 600만 톤입니다. 600톤이 아니라 600만 톤! 돌 하나의 무게가, 2.5톤에서 10톤까지나 돼요. 돌 하나의 무게가! 거기에 쓰인 석회암은 가자 남동쪽 15km 지점 엘 뚜르 등에서 캐어 온 거고, 화강암은, 850km 떨어진 곳에서, 나일강을 통해서 실어온 거예요. 10톤짜리 돌멩이를요! 850km 떨어진 곳에서! 지금부터 5천 년 전에 만든 거예요. 하루 10만 명이, 20년 동안 매일 만든 거죠. 중장비가 없던 그 시절에 이건 불가능이다 해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든 거거든요. 피라미드는요! 그래서 사람들이 외계인들이 와서 만들었다하는데, 아뇨. 그런 거 궁금해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내가 신이 되기 위해, 뭐든지 한다니까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건 그냥 놔뒀잖아요? 지금도 이집트의 관광 수입의 대부분을 그 피라미드가 벌어들이고 있단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놔두시는 거예요. ‘열심히 쌓아라! 계속 쌓아라! 기적을 만들어내어라! 그리고 죽어라.’ 놔두시는 거예요.

 

은혜의 계단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되는 거예요. 그 은혜의 계단! 그 은혜의 통로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예요. 그 야곱의 사다리, stairway가 요한복음 1장이 다시 나오죠?

(요한복음 1:51)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성전 되신 예수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예수가, 하느님의 사자(使者), 복을 갖고 내려온, 은혜를 갖고 내려온, 사자가 되어 stairway 끝에서 있는 거예요. 예수란 말입니다. 예수가 내려오신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성화하여 올라가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예수란 길을 통해서, 성전, 즉 하느님나라로 입성을 하게 되는 거지, 자신이 쌓는 계단을 통해서, 성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 거예요. 그래서 바로 뒤에, 요한복음 2장에서, 여기서 참 성전이신 예수의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성전계단, stairway. 그러면 옛 성전이 기각 당해야죠. 그래서 바로 그 뒤에 옛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나오는 거예요. 옛 성전 때려 부수는 거예요. 내가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전 정화 사건과, 하느님나라의 stairway, 계단으로서의 예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하나 삽입이 되어 있어요? 그게 뭘까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란 말입니다.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게 인클루지오 구조라 그랬죠? 양쪽의 빵을, 가운데 속이 강화시켜주는!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은 정결예식을 행할 때 쓰는, 물을 담아 두던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비어 있었다는 걸 기억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려고 했던 그 물! 그 율법의 항아리가, 결국은, 다 위선적인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걸 먼저 드러내죠. 그래놓고는 그걸 포도주로 그걸 채워버려요. 예수님이! 포도주 항아리가 여섯 개!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안식!’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의미하는 거죠? 잔치가 잔치되기 위해서는, 어린 양의 피가 반드시 전제 되어야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새 창조의 완성은, 반드시 창조의 수칙이 필요한데, 항아리가 여석 개란 말인데, 그러면 일곱 번째 항아리는 예수란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가 일곱 번째 포도주 항아리가 되는지 보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세요. 그건 성경의 말씀을 이뤄지게 하기 위함이다그래요. 목이 마른 게 아니었어요. 뭘 이루게 하기 위해 내가 목마르다그랬어요. 뭘 지금 유도하고 계시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포도주를, 해면에 묻혀서 우슬초에 묶어 예수님께 댄다고요.

(요한복음 19:28-30) 28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29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30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 우슬초에 발린 포도주를 받으시고,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이제 끝! 돌아가셨어요. 왜 하필 포도주죠? 그리고 이 포도주는 뭘 의미합니까? 그리고 왜 그건 굳이 우슬초에 매어서, 전달이 됐을까요? 창에다 매어서 줘도 되잖아요? 먼저 그 포도주가 뭘 의미하는 지 한 번 보세요.

(마르코복음 10:38) 38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셔야 할 잔이 있죠.

(루가복음 22:42 상반절) 42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님이 받아야 할 잔이 있어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받으신 이 잔! 저주의 잔! 심판의 잔! 예수님은 이 잔을 받고 운명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신 포도주를 맨 마지막에 마시고 죽는 거란 말이에요. 이 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했던 이 잔! 그런데 성경에는 이 잔 말고 또 다른 잔이 나와요.

(루가복음 22:20) 20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제자들에게 주는 잔도 나와요. 그것도 포도주에요. 그런데 그건 예수의 피라 그래요.

보십시오. 우슬초가 뭐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어린 양! 무죄한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던 도구가 우슬초예요. 그런데 거기에 발린 피가, 어린 양의 피라고요.

 

지금 세례자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하는 그 어린 양이 십자가에 달려 있어요. 거기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려져야 돼요. 우슬초에 발려져야 돼요. 발려지기 위해선, 예수가 먼저 죽음의 잔, 심판의 잔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해, 먼저 신 포도주 잔이, 예수께로 가는 거죠. 받고, 다 이루었다! 죽는 거예요. 진짜 그 피가 우슬초에 묻혀, 우리에게 발려진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어진 거예요. !

그러면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그 우슬초에 발린 어린 양의 피가, 200만 명의 집에 발려 졌어요. 200만 명이면 지금, 직할시 인구입니다. 200만 명이 다 착했을까요? 200만 명 중에, 도둑놈이 없었을까요? 그 사간에 부부싸움 하던 사람이 없었을까요? 그 시간에 강도짓 하던 놈 없었느냐고요? 고 시간에 간음하던 자들 없었겠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 안의 내용물은 안 보고, 피만 보고 넘어가신다니까요.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가? 그걸 근거로 피가 발려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창세전에 불가항력적으로 택해버린 그 자들에게, 그냥 발려지는 거예요. 거기에서 찬송(讚頌)이 터지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피가 우슬초에 발릴 때, 온 세상이 한 일이 뭐냐고요? 합심하여 예수 죽인 거 밖에 더 있어요? 뭐 했냐고요? 그래서 그 주위에 전부 마리아 밖에 없었다, 그러죠? 이름이 딱 하나 나와요.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가 뭐죠? ‘마라’ ‘쓴 물들이 단 물이 되기 위해, 예수의 피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인 거라고요. 그 은혜를 찬송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마라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돼요. 그걸 진짜 아느냐고요?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 알고 가야 할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 더 이상 필요 없어요. 나에게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거 하나 알면, 다른 거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자랑하지 마세요. 무슨 신학과 교수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우슬초에 묻혀진 새 언약의 피도,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로 발려지는, 예수의 피에 초점이 있는 거지, 그 피가 발린 대상의 자격과 조건과 업적과는, 별 관계가 없어야 돼요.

잘 들으세요. 새 언약의 피로, 우리 성도들은, 새로운 출애굽을 하게 되는 거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엑소더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렇다면 지금 성도가 나와야 하는 애굽이, 어디겠냐고요? 여러분도 어디서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 피를 지금 예수님이 발라놨는데, 어디서 나와야 되냐고요? 그걸 알아야, 막 살든지, 말든지 할 거 아녜요? 여러분이 나와야 되는 애굽은 어디냐고요? 도대체가 우리가 어디에 갇혀 있고, 또 다른 우슬초에 피가 발려지냐고요? 그 애굽이 어딘지는 요한묵시록에 나와요. 볼까요.

(요한묵시록 11:8-11)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바벨론)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11 사흘 반이 지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셔서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어디죠? 예루살렘입니다. 율법주의의 총화! 율법주의가 예수를 죽인 거죠? 은혜의 이야길 했다고! 왜 인간의 자존심을 박박 긁느냐고? 예루살렘이 예수를 죽였다고요. 거기에서 예수가 율법이 되어, 죽으시는 게 십자가예요. 그죠? 그 곳에서 두 증인! 교회(성경)가 죽습니다. 율법주의에게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 생기를 받아서 다시 살아나죠. 그런데 그곳이 애굽이래요. 그러니까 성도가 나가야 할 곳은 바로 여기예요.

 

새 언약 하에서의 새로운 출애굽은, 바벨론, 이 세상! 바벨탑 쌓기의 현장, 이 세상! 바로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된 !’ ‘에게서 죽고, ‘에게서 빠져 나오는 걸, ‘새 언약 하의 출애굽!’이라 하는 거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거요. 하느님과 연합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서 나와서!

라는 자아 안에 갇혀서, 그게 지옥이잖아요? 흙 안에 갇힌 게 지옥이지 뭐예요? 나의 신 됨을 구축하려 하는 자들이 쌓는 그 계단이, 바벨탑이었잖아요? 그 바벨론에서 내가 죽는 거예요. 두 증인! 교회! ‘가 죽는 거예요. 그걸 겉사람의 낡아짐이라 그래요. 하느님이 놔둬요. 그리고 생기에 의해 새롭게 살아나는 거. 이게 십자가와 부활이에요. 이게 역사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에 똑같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죽은 곳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새 언약 하의 새로운 출애굽이라 그래요. 그러면, 이 역사 속 바벨론에서, 우리 성도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 뭐겠어요? ‘나의 죽음이에요. 그리고 새로운 나에로의 탄생이에요.

잘 들어 보세요. 우리 인간들은 원래 없음이죠. 원래 우리의 처음 자리는 없음이에요. 따라서 그 없음, 스스로, ‘라는 자아를 구축하거나 규정할 수가 없어요. ‘없음이기 때문에. ‘는 없는 거란 말예요. 원래가! 그러면 그 없음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외부에서 어떤 대상이, 나에게 라는 내용을 주입해 줘야 돼요. 그래야 비로소, 없음이라는 존재가, ‘라는 자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고요.

여러분은, 바로 그 육이, 죽는 경험을 이 세상 속에서 해야 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걸 끊어 가시는 거예요. 내가 내 생명처럼 여겼던 것들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끊어 가시면, 그러면 나는 뭐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자식을 생명처럼 여기면, 그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죽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그게 나라니까요. 돈이 내 생명이었을 땐, 돈이 없어지면, 그 돈 때문에 내가 죽고 싶잖아요? 그게 나라고요. 내 생명이라고요. 그런데 이게 다 제한된 이 세상 것이니까, 이게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게 되는 거요. 이게 죽음이라 그래요. 반대로 영생은 뭐겠어요? 나와 관계하고 있는 그 분이, 영원히 사시는 분일 때, 그 분이 내 생명이 될 때, 영생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 속에서, 육과 관계 맺고 있는, 땅과, 흙과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걸, 차단당하고, 그래서 이렇게 힘든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 흙을 붙드는 거예요. 생기로! 그게 성령이잖아요? 여러분 그걸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 한다 말입니다.

(요한복음 6:63)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고린도전서 15:50) 50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 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 인생에 의해 규정된 ? 육은 무익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나라도 유산으로 받을 수 없는 거라고 하잖아요? 한 마디로 죽은 흙이, 저주 받은 땅에서 만들어 낸 그 어떤 업적과 공로도, 하느님이 일절 받지 않으신단 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은, 나를, 영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셔야 되요. 그걸 거듭 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3:3)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아노뗀,’ ‘거듭나다는 말은 위로부터 나다. 땅에서 난 것은 아무 것도 안 돼요. 위로부터 나야 된다고요. 땅에서 난 나는, 아녜요. 모두 육이란 말입니다. 땅에 것으로 규정되는 가 죽고, 위에 계신 분, 즉 성령에 의해 규정되는, ‘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으로부터 규정되는 나는 뭐요? 하느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 ! 거기에서 있음의 흉내가 어떻게 나올 수 있냐고요? 그게 라니까요.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흙이고, 하느님의 생기가 덮여, 하늘 백성이 된, 하느님나라의 장자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의 역사 속 인생이, ‘라는 육적 자아의 죽음으로 점철이 되는 건, 바로 그러한 이유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승승장구(乘勝長驅)의 자리에서, 지리멸렬(支離滅裂)의 자리로 내려가는 게, 맞는 거예요.

하느님이! 성령으로,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성령으로 태어난 여러분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요한복음 3:6)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그것, 영으로 난 것만 산 거란 말이에요. 그것만 산 거! 그래서 하느님은 이 역사 속에서, 인간이 밀어내버린 상위 권위, 하느님, 그 예수를, 다시 원래의 자리에 올려놓아 버린 거예요. 이게 부활(復活)과 승천(昇天)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쫓아내봐라. 아무리 잘 난 척 해 봐라! 이미 내 아들은 승천하여, 그 자리에,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단다. 그러니까 항복해!’ 성도만 이 음성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성도의 역사와 인생은, 끊임없이 육적 자아를 하느님으로부터 폭격(爆擊)을 당하게 되고,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나 질그릇 맞음의 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고, 위로부터 나는 것, 거듭남만이, 우리의 진짜 살 길이라는 걸, 확고하게 붙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부로 여러분의 선악판단으로 깨끗한 거, 더러운 거, 저건 악, 이건 선,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이거는 벗을 거라니까요. 여러분이 작품이 아니라, 그릇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왜 이 껍데기에 그렇게 관심을 가져요? 이걸 어떻게 하면 성숙시켜서, 하느님의 기쁜 그런 열매로 만들어 낼까? 어떻게 하면, 이 몸뚱아리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보호하여,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제사로 드릴까? 그러니까 이 병신들이, 제 와이프가 첫날밤에 너무 적극적이었다고, 이혼소송을 하고, ‘너 처녀 아니지?’하고 위자료를 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일이 하루에도 수십 건이나 돼요. 자기들은 더 더럽게 살면서! 그래서 그 몸둥아리가 좀 더러워졌으면 어떠냐고요? 원래 더러운 건데, 예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9)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 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뭘 선전(宣傳)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했다 그래요? 예수의 아름다운 덕! 은혜! 그거 선전하는 게, 우리의 의무이며 역할이라니까요. 그걸 너무 섣불리, ‘내가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놀라운 성숙을 이뤄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예수 믿는 자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좀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주먹 불끈 쥐고, 이 악 물어서 되던 가요? 욕이나 먹이고~

 

(필립보서 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죽는다는 건,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아도, 내 안에서 예수가 존귀(尊貴)하게 된다면, 나는 감수(甘受)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 옆에 달린 강도가 되어서라도, 예수님의 그 용서가, 십자가 보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누가 강도로 죽고 싶어요? 이왕이면 슈바이처로 죽고 싶지. 그런데 살든지 죽든지 뭐든지 괜찮다는 거예요. 예수만 높아진다면, 그게 그 뜻이란 말입니다. 그게 약할 때 강함인 거예요.

(고린도후서 5:14-17)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보세요. 바오로는, 예수의 은혜만을 증거(證據)하는 자로 살았다는 거예요. 예수가, 이 세상에 연약(軟弱)한 자로 왔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외모(外貌)를 보고, 저건 믿어서는 안 될 존재구나라고, 겉으로 평가한 것처럼. 그러나 그 분이 진짜 구원자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그렇게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고 아직도 저 모양이야! 예수 믿고 아직도 저렇게 저 자리에 저렇게 있어!’라고 판단(判斷)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 우리는 다 죽은 자고,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그려내는 대로 살아야 되는 자이기 때문에, 그걸로 절대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에요. 이제는 외모로, 육으로, 판단 받아서는 안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잉여공로설이니 뭐니 하면서, 성도에게 잉여공로(剩餘功勞)가 어디 있어요? ‘나는 뭘 해도 다 무익(無益)한 자입니다가 성도의 신앙고백이어야지,

그러면 아버지가 사랑이라는 게 뭐냐고요?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예수를 주셨구나!’라는 걸, 내가 알고, 깨닫고, 내 안에 있는 예수를, 그 사랑의 실체를 보여 줄 때, 이걸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거예요. 교회끼리! 예수를 아는 교회(하느님백성)끼리만 할 수 있는 게, 예수라는 사랑교환이라고요. 그 사랑이신 하느님, 예수를 붙드세요. 예수를 믿으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느님과 화목(和睦)하여 하늘나라 가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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