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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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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10-13 ㅣ No.141396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속에 담긴 것 (루카11,37-41)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갈라5,1~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으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6)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 번역된 '(우테 페리토메 티 이스퀴에이 우테 아크로비스티아 ; ute peritome ti ischyei ute akrobystia)는 직역하면  '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고 비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다' 이다.

 

'우테 ~ 우테'(ute ~ ute)는 영어의 'neither ~ nor' 과 같이 '~도 아니고 ~도 아니다', 혹은 '~도 없고 ~도 없다' 라는 이중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그리고 번역이 생략된 '티'(ti)는 '어떤 것'(anything)을 뜻하는 형용 대명사이며, 본문에서는 '우테'(ute)와 함께 쓰여 '아무것도 아니다(없다)' 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요하지' 에 해당하는 '이스퀴에이'의 원형 '이스퀴오'(ischyo) 원래 '~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란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육체적으로 강하다' 즉 '건강하다'(마르2,17), '능히 ~하다'(루카6,48), '~할 힘이 있다'(루카16,3), '~할 수 있다'(필리4,13), '효력이 있다'(히브9,17) 등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우테 ~티 이스퀴에이'는 '~ 할 수 있는 아무 힘도 없다', '아무 효력도 없다' 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신 가운데 다른 두 곳에서도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는 갈라티아서 6장 15절이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린토 전서 7장 19절이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들을 비교하면 본문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경우에서 모두 사용된 반어법적인 확실한 말은, 그렇다면 과연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효력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란 문제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이것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임을 밝히고 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왜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서에서 두 번씩이나 할례 뿐만 아니라 '비할례'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할례'(peritome;페리토메; circumcision)란 말에 대한 반대말로서 그 말을 첨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할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할례를 받지 않음(비할례; akrobystia; 아크로비스티아; uncircumcision)으로써,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은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은 그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7장 18절 "누가 할례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받은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할례 받지 않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는 권면을 통해서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할례나 비할례 어느 쪽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할례를 받거나 비할례로 남거나 그것은 어느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믿음' 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필요없이 관심을 가졌던 할례와 비할례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앞선 두번의 부정에 이어, 바오로는 '그러나'(alla; 알라; but)란 뜻의 접속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 부분에 집중시킨다. 여기서 '~으로(써)' 에 해당하는 '디'(di) '~을 통하여'(through), '~으로 말미암아'(by)란 뜻의 매개체나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써, '믿음' 이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행동하고 표현되는 믿음만이 효력을 갖는 것이다.

 

한편 '행동하는' 에 해당하는 '에네르구메네'(energumene)의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는 '운동력있게 일하다' 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의 형용사형 '에네르게스'(energes)는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라는 표현에 쓰였다.

따라서 '에네르게오' 라는 단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효력을 갖는데, 그 믿음도 사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살아서 운동력있게 나타나는 믿음뿐이라는 사실이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1,37~41)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38~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행위는 당시 유대 사회의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으며,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다.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사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철저하게 지켜온 규범이었다(마르7,3.4).

 

사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의식적인 차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적 정식을 왜곡한 유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강하게 책망하시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식사 전에 손도 씻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등 거룩하고 고결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왜곡하고, 그 속마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하는 등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탐욕'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greed)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조'(harpazo)에서 온 말로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브10,34; 마태23,25).

 

루카복음 16장 1~13절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끝난 다음에 바로 루카복음 사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16,14)이라고 하면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는 바리사이들이 돈에 대한 탐욕으로 '과부들의 가신을 등쳐' 먹는 행위까지 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은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악'에 해당하는 '포네리아스'(ponerias; wickedness) '악한 성품의', '타락한'이라는 뜻을 지닌 '포네로스'(poneros)에서 유래하여 '시기심', '악의'(로마1,29)를 의미한다.

루카 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되찾은 이들의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큰 아들은 분명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실과 또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루카15,28).

 

이처럼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지독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그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아프로네스'(aphrones; you foolish people)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aphron)의 복수 호격이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고,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자칭 타칭 의인이요,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해 겉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1장 41절의 '속에 담긴 것'에 해당하는 '타 에논타' (ta enonta; what is inside)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음식, 마음, 재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루카복음 11장 39절의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그런 탐욕과 사악의 마음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기에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에서 부정한 재물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alms)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는 말씀은 자선의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 panta; all thing; everything)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느님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선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들을 더러운 탐욕과 사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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