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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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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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0-10-17 ㅣ No.141492

신학생 때입니다. 제의실에는 책들이 있었습니다. 수녀님께서 복사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동화책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입니다. 큰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습니다.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책도 읽었습니다. 청년이 된 소년은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 주었습니다. 청년은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노인이 된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 그늘이 되어 주었던 나무는 이제 노인을 위한 쉼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소년에게 그늘이 되어 주었고, 청년에게는 배가 되어주었고, 노인에게는 쉼터가 되어 주면서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연탄장사, 쌀장사, 밥장사를 하셨습니다. 강철 같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체력이 다하셔서 많이 아프셨습니다. 일을 하지 못하실 때는 자식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신앙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도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썼던 쉘 스타인벡의 작품입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잘 구를 수 없었습니다. 빠진 이를 찾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꽃을 만나고, 풍뎅이를 만나고, 구름을 만나고, 소나기를 만나면서 잃어버린 짝을 찾았습니다. 어떤 것은 너무 커서 맞지 않았고, 어떤 것은 너무 작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짝을 찾았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맞는 짝이었습니다. 완벽해진 동그라미는 거침없이 구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르기만 할 뿐 꽃도, 풍뎅이도, 구름도, 소나기도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같이 구르는 짝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조금 불편하지만, 조금 늦게 구르지만 편안했습니다.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부족한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의실에서 복사들이 읽는 동화이지만 어른에게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신학적인 깊이와 철학적인 통찰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미주 지역에서 교회의 소식을 알리고, 복음의 기쁨을 전했던 가톨릭 신문이 폐간 되었습니다. 이제 미주 지역에는 가톨릭 평화신문만 남았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정보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북미주 사제회의에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의지할 수 있었고, 도움이 되었던 가톨릭 신문의 폐간 소식을 들으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코로나19로 팬데믹 상황이 오래가면서 경영의 어려움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문을 사랑하시고 구독해 오셨던 독자들에게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구독자의 감소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홍보를 갈 수 없는 것도 어려움입니다. 북미주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교회의 소식지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기존에 가톨릭 신문을 구독하셨던 분들은 가톨릭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북미주에 계신 본당 신부님들께서 유일하게 남게 된 가톨릭 평화신문을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북미주 신앙공동체를 위한 매일미사에 가톨릭 평화신문에 대한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본당으로 홍보를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도 우리가 가진 신앙을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전교를 열심히 하시고, 잘 하시는 분들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많이 배웠거나, 시간이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장에서 힘들게 장사를 하시는 분도 있고, 대학 공부를 못 하신 분도 있고, 가정일도 하고, 직장 일하기 때문에 바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전교를 많이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전교 방법을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전교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몸으로 뛰셨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만나셨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자 병든 자, 외로운 자를 더욱 많이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셨고, 힘을 주셨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기도 하셨고, 언제나 섬기는 자가 되라 하셨고, 자신의 십자가를 먼저 지라 하셨고,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고, 양들을 푸른 시냇가로 인도하고, 비가 오면 양들을 안전한 우리로 인도하며,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면 지팡이를 들고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혼자 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제자들을 신뢰하셨고, 제자들에게 힘을 주셨고, 제자들과 더불어 전교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은데서 시작하지만 엄청난 결실을 맺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분이셨지만 기다려 주셨고, 인내해주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피눈물이 나도록 기도하셨고,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워 잠을 자고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며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기도는 바로 전교의 힘이며, 기도는 바로 전교의 발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항상 당당하셨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셨지만, 비록 내일 어찌될지 기약은 없으셨지만 늘 당당하셨고, 자신감이 있으셨습니다. 당당한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셨고,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불의와 권력을 야단치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지치고, 힘든 자 앞에서는 늘 자비를 베푸셨고, 늘 그들에게는 약하셨습니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좋아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짧은 글인데 제게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사랑을 나누는 것,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좋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가톨릭신문을 구독하셨던 분들께서 평화신문의 구독을 원하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eacetimes93@hotmail.com , peacetimes1993@gmail.com으로 성함, 주소, 전화번호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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