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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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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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0-10-21 ㅣ No.141578

교회의 4대 교리 중에 강생구속이 있습니다. ‘강생(Incarnation)'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이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한 대로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교리입니다.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는 육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자비와 선행을 쌓으면 더 낳은 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교만과 악행을 쌓으면 더 비천한 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어서 해탈하면 윤회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에는 불교적인 윤회의 사상이 남아 있습니다. 힌두교는 육화를 아바타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합니다. 힌두교에선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인터넷 시대에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를 보신 분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식이 다른 생명체에 전이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되듯이 의식도 에너지와 기를 통하여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나의 의지와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강생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죄가 생겨났고, 죄의 결과는 비참한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 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 강생의 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일꾼에게 소작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일꾼을 죽였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소작인들이 아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마저 죽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에게 맡긴다고 합니다. 이처럼 강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예언자, 하느님의 아들을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학자들은 강생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강생을 통해서 세상을 한 차원 더 높게 만들어 주셨다고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생로병사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해가 뜨면 지듯이, 꽃이 피면 지듯이, 달도 차면 기울 듯이 모든 것은 변하고, 변화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천년도 지나간 어제 같고, 삶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과 같았습니다. 허무할 것 같은 세상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강생의 신비를 잘 이해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토 전서 13, 12)” 프란치스코 성인도 강생의 신비를 하느님께서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떼이야르드 샤르댕 신부는 이 강생의 신비를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라고 이해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 강생의 신비를 우주 이야기(The Universe Story)’라고 이해했습니다.

 

핸드폰을 새로 마련하면 주소록과 사진과 같은 정보를 옮기고 전에 쓰던 것은 버리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핸드폰의 기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두고 예전의 핸드폰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삶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명예, 권력, 재물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여전히 추구한다면 이는 새로운 핸드폰을 마련하고도 헌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것들만 추구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죽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삶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과는 결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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