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부활 제6 주일

스크랩 인쇄

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2-05-21 ㅣ No.155211

지금은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지도를 보았습니다. 자동차에는 전국지도가 책으로 한권씩 있었습니다. 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길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공위성에서 위치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길을 찾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지도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줍니다. 실시간으로 도착시간을 알려줍니다. 교통경찰이 있는 것도, 속도위반을 측정하는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알려줍니다. 지금보다 더 빠른 길을 찾아서 알려줍니다. 지금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10년 이내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원하는 목적지만 입력하면 자동차가 알아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가는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교의 전통과 계명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셨고,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을 준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를 만났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전통과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은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 때문에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는 생소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나라, 복음의 기쁨은 할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 지도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발전하였듯이 초대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에서 자유로워진 초대교회는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공무원으로 있다가, 시골로 가서 洗心院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서 지내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열쇠를 100개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원하면 하루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집입니다. 물론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 세심원을 이용하는 비용이 한 달이면 300,000원 정도 든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비용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매일 하려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나무를 보면서 본인도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고 합니다. 보리는 추운 겨울에도 파란 싹이 돋아난다고 합니다. 보리를 보면서 삶의 시련이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틈이 나면 집 주위에 를 심는다고 합니다. 차의 향은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차가 자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맑게 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재생의 삶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교리와 교훈으로 젖을 먹고 생명의 빵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는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되며 지혜와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물은 하느님 나라의 복된 생활입니다. 우리가 거처할 곳은 하느님 나라이며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 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272 4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