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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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에서 흘리는 참회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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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2-06-12 ㅣ No.155639

 

며칠 전에 타교구에 계시는 한 형제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묵주반지를 보고 신자인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점심을 같이 하게 됐고 지금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형제님과 약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분과 나눈 대화는 우리 신앙인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한번 공유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그분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단 한마디로 내용을 요약해서 제목을 올린다면 '하느님께서 앞으로 1년의 시간을 주실 수 있다면' 이게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꾸리아 단장과 본당 회장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교구에서 봉사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것만 간단히 그분의 이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야 그분이 하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그분의 입장에서는 인간적으로 보면 남은 시간을 조용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 돼야 하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본인도 그걸 알고는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가족의 생계 때문만의 이유로 일을 하시는 게 아니였습니다. 생계도 생계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이 엄청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신앙이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까지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며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일반적인 보통사람이라면 그분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나 열심한 신자라고 자부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랬던 생각이 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봉사라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봉사는 사랑의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동유형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봉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분도 이런 관점에서 봉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니 자신의 신앙과 봉사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셔야 하는데 그 중심에 인간적인 욕심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을 아마도 정상적인 삶을 살다가 간다고 해도 평생 알지 못하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관점의 변화는 죽음이 눈앞에 와서 그런 게 아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이후에 다가올 세계에 대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그런 성찰을 하게 된 것이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사람은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건 막상 그 시간이 자기 코 앞에 바로 왔을 때 그게 실감이 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 동안 본당에서 있었던 장례미사를 보면서도 그 장례미사가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될 시간이 올 수 있다는 걸 막연하게는 인식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선 이런 사실을 먼저 잘 알아야 된다는 게 그분이 지금에 와서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분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봤을 때 천국을 가리라고 하는 자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분이 교만해서 천국을 확신한 게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 정도 확신을 할 만큼 열심히 생활하였다는 반증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솔직한 표현을 하자면 자신의 신앙은 하느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인 과욕이 앞섰던 것입니다. 명분은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과욕 때문에 그때는 그게 공동체 사람들에게 상처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될 수 있었는데 그게 상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그땐 왜 몰랐을까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는 것은 만약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평생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하느님께 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그런 걸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남은 시간을 자신의 삶을 정리를 한다면 자신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전에는 몰랐지만 상처를 준 사람들 각 개인에게 참회의 용서를 청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명분이 하느님 일이라고는 해도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근본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 그제 복음이 생각납니다. 하늘나라에 가려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분의 말씀을 성경을 인용해서 표현한다면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시면서 봉사를 했을 땐 단순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의로움으로 생각하고 하셨을 테니 말입니다. 이분의 사례를 보면서 그제 복음이 더 실제로 가슴에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지금은 위령성월은 아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얼마의 시간을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시간을 의식하면서 하루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루 하루의 시간이 하느님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자기 영혼의 집을 만드는 작은 벽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가게 될 장소인 하늘나라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라 장소는 하느님이 주시겠지만 거처는 어쩌면 자신이 이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신앙으로 집을 짓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묵상도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묵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분이 말씀은 하시지는 않았지만 느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의 한 평생 시간은 정말 긴 것 같아도 길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이 사실을 실감하면 하루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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