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7일 (일)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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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 조욱현 신부님_ 전삼용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 병자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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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06 ㅣ No.186693

이병우 신부님_<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12.6) 

 

"그들은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루카2,6-7ㄱ) 

 

'우리도 주님을 낳아드리자!' 

 

12월의 첫 토요일인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에 대한 강론'입니다. 

 

오늘 복음(루카2,1-14)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는 때이다 보니,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들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기름부음받은이), 주님,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사람이 되신 말씀(로고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탄생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태어나심이 참으로 특별합니다.

보잘 것 없는 나자렛 처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태어날 자리가 초라한 구유입니다.

또한 그분의 탄생 소식이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집니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 메시아요 우리의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오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그분의 탄생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내신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 됩니다."(1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10절) 

 

내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시기의 본질이며,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합시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이 나에게 큰 기쁨이 되게 합시다! 

 

(~ 2역대32,33) 

 

 

 

 

 

전삼용 신부님_교회를 망치는 순교자 콤플렉스 

  

7세기 이전, 북아프리카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키프리아노 같은 위대한 교부들을 배출한 가톨릭 신학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곳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모스크만 남았습니다.

왜 그 찬란했던 교회는 멸망했을까요?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독점'이었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로마에서 온 라틴어 사용자들끼리만 사제직을 독점했고, 현지인인 베르베르족을 사제로 키우는 데 인색했습니다. "저들은 무식해서 안 돼"라는 엘리트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와 라틴 사제들을 추방하자, 목자를 잃은 양들은 순식간에 이슬람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반면 토착민 사제를 열심히 키웠던 이집트 콥트 교회는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엘리트주의는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이러한 비극은 세속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33세에 요절하며 "제국을 누구에게 물려주겠느냐?"는 질문에 "가장 강한 자에게"라는 무책임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정복자였을지 몰라도, 백성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을 나눌 2인자를 키우지 않았기에, 제국은 그의 죽음과 동시에 장군들의 내전으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점욕은 결국 자신이 쌓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 봉사자가 없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순교자 콤플렉스(Martyr Complex)'라는 용어를 씁니다.

입으로는 "나만 고생한다,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하지만, 막상 누군가 도와주려 하면 "당신은 이 일을 몰라"라며 거절하고 일을 움켜쥐는 심리입니다.

이들은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나 없으면 조직이 안 돌아간다'는 그 비장미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시지만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당신이 가진 '마귀를 쫓고 병을 고치는 권한'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너희도 가서 하라"며 파견하셨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제자가 자신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참된 목자는 양 떼 속에서 또 다른 목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 내 자리를 대신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후배 양성에 소홀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경쟁자를 죽였던 헤로데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기술자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여기, 자신보다 더 우수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이 눕다."

그는 일꾼을 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더 나은 일꾼을 세울 때, 하느님의 사업은 더욱 번창합니다.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한때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라고 하느님께 불평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열정이 아니라 영웅주의적 고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아직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이 있다.

가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세워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해결책은 엘리야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짐을 나누어 질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의사들이 다 죽거나 도망쳐 치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일반인들도 임종을 지키고 고해를 들을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허락했습니다.

밭이 썩어가고 영혼들이 죽어가는데 "자격증이 있느냐"를 따지며 기득권을 지킬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성소자 가뭄이라는 흑사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다, 수녀가 없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소 발굴을 위해 뛰고 평신도 리더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주님께서는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일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나 혼자 영광을 독점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진심으로 내 짐을 나누어 질 형제를 보내 달라고 기도합시다. 

 

후계자가 끊긴 제단에는 잡초만 자랄 뿐이지만, 일꾼을 키우는 교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자라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제자들을 뽑으셨던 예수님의 모습대로 자신의 일을 이일 일꾼을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자비로움과, 그분이 제자들을 선택하고 파견하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9,36절) 그들을 가엾게 여기셨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울어 있으며, 바로 그 연민에서 사도의 소명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9,37절)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어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게 하신다. 

 

오리게네스는 이 본문을 주해하며 “추수할 것은 많다.” 말씀을 인류의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갈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한 것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영혼을 돌볼 준비가 된 목자가 부족함을 의미한다고 했다.(Comment. in Matth. X,17) 성 그레고리오 교황은 목자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참된 목자는 양들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삼는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가 가진 어떠한 가르침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Regula Pastoralis II,5) 아우구스티노는 제자들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는 말씀을 주해하며, 참된 사도의 삶은 사적인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Sermo 100,1). 교리서는 복음 선포와 자비의 행위를 떼어낼 수 없는 사명으로 제시한다. 즉,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동일한 소명이다(2447항). 선교 교령은 선교를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어받은 교회의 본질적 임무”(5항)로 설명하며, 모든 신자가 그 사명 안에 참여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오늘도 군중을 바라보시며 가엾이 여기신다. 세상은 여전히 영적 굶주림과 상처로 가득 차 있으며, 주님은 우리를 그 치유와 추수의 일꾼으로 부르신다. 주님의 부르심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례받은 모든 이는 주님의 제자이며, 파견받은 선교사다. 우리가 가진 은총은 거저 받은 것이기에, 거저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사명을 수행하는 힘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능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배반자 유다조차도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약함과 불충 속에서도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보여 준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시어,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신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각자의 삶 자리에서 주님께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며, 이 시대의 추수꾼이 되어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파견하시도록 기도하며, 양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그분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자. 아멘! 

 

 

김건태 신부님_기쁨의 증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남긴 명언 가운데 ‘슬픈 성인은 거룩하게 슬픈 사람일 뿐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격언으로 자리한 이 말씀은 사실 복음이 말하는 지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뿌리 깊은 기쁨 속에 살며,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을 권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메시지는 슬프거나 불행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사명, 표징을 동반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부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징들은 슬픔에 대한 기쁨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죄에 대한 하느님 자비의 승리를 가르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제자들의 기쁨은 물리적인 단순한 차원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고 체험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는 참 기쁨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강렬하게 의식하며, 성령의 이끄심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오래 슬픔 속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하나 새겨나가는 힘든 여정의 한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이 힘든 여정을 앞서서 그리고 대신 헤쳐 나가시는 분을 늘 바라보며 그 뒤를 따라가고자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기쁨이라 하더라도, 이 기쁨 속에 잠재우고자 애쓰는 슬픔으로 슬픈 이 세상에 살면서도, 제자들은 무한한 사랑을 기초로 한 기쁨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제자들의 뒤를 이어 우리는, 사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생명과 희망의 표징들을 싹틔울 사명 앞에 섭니다. 모두 다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아직도 존재하는 악의 세력들을 어떻게 쫓아내야 하는지, 이 세력의 종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유의 맛을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 더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 축제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리거나 마다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지를 고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구원에 협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희망과 신념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는 기쁜 소식의 선포자이며 전달자입니다. 신앙의 새로운 한 해에 접어들어, 더욱 열정적인 기도와 온전한 사랑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힘차게 선포하는 신앙인의 삶을 되새기고 다짐하는, 값진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9,35-10,1).”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6-8).”

 

 

 

1) 예수님께서 가엾게 여기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나의 목자’이신 분입니다.

 

‘내가’ 성탄절을 잘 맞이하려고 이렇게 대림시기를

 

지내는 것은, 성탄절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이시며

 

메시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세주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허약한 이’ 라는 것과 “목자 없는

 

양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 라는 것과

 

‘길 잃은 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는 말만 한다면,

 

또 “나는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 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남보다 ‘위에’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앞에서 똑같은 처지에 있는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복음 선포도, 사랑 실천도, ‘같은 처지’에 있는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먼저 복음을 듣거나 조금 늦게 듣거나,

 

조금 먼저 믿거나 조금 늦게 믿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 ‘먼저’ 라는 것이 ‘위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과

 

성직자들, 수도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입니다.>

 

 

 

2)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의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군중의 처지를 모르고

 

계시다가 군중을 보신 다음에야 가엾은 마음이 드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인간들을 가엾게 여기셨고,

 

그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인류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길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길’을 알려 주셨고,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앞장서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이라는 말은, ‘목자가 있는데도

 

마치 목자가 없는 양들처럼’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목자를 떠났거나 잊어버린 사람도 있고,

 

목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 목자가 없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 라는 말은, ‘구원의 길’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전체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3)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그 일꾼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녀는 아버지의 일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더 많은 사람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청하여라.’, 즉 ‘기도하여라.’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 하고,

 

그래서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4)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에게

 

먼저 가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이고, 이 말씀은 사실상 “회개하여라.”입니다.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치유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은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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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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