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스크랩 인쇄

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8-07-04 ㅣ No.121643

 

고양이와 개는 표현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겉으로 보면 같은 모습이지만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대화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이 내미는 손이 가식과 거짓으로 보일 것입니다. 불신의 눈으로 보면 상대방 보내는 화해와 평화가 위장으로 포장한 거짓 쇼로 보일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습니다. 미군의 유해가 북한에서 미국으로 송환될 거라고 합니다. 미국은 남한과의 군사훈련을 잠정적으로 중단할 거라고 합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기지를 없앨 거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이 미국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진정성을 믿어 주는 것입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풀어주면 좋겠습니다.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 간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만나고, 북한에서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단식을 선포하고, 회개를 말하니까 사람들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만나고, 거리낌 없이 음식을 먹으니까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다고 비난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 주시는 진심 어린 조언과 충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때로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불은 산소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맞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신화는 불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드러나는 표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촛불은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낸 상징이 되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희망의 불을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소유와 탐욕에 물든 사람은 변화의 불을 피하려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개혁의 불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보여 준 극단적인 길을 보았습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이룩했던 모든 문명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칼이 음식을 요리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칼은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문명은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지나친 경쟁과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명은 가난, 질병,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많은 이웃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인간의 탐욕과 욕망 때문에 오염되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 파괴되고 있기도 합니다.

 

문명은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명은 밭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변화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불을 밝히셨습니다. 변화의 불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개혁의 불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불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는 예수님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변화와 개혁이 두려웠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나누어 주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 바라셨습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성령과 악령을 구별할 수 있으면 우리는 신앙 안에서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을 구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3가지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는 열매를 보고 참된 영과 거짓된 영을 분별해낼 수 있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결과가 공동체를 분열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면 그것은 악의 개입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악한 것들은 그 결과를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관을 통해 악령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분입니다.

셋째, 우리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그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인격과 생각을 외부에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화가 난 사람은 분노의 말을, 야비한 생각을 품은 사람은 야비한 말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비와 은혜의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 사람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항상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높이지 않고 은근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말을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탐욕의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머리를 들고 흔들어 댑니다. 어떤 영이든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높이는 대신 인간을 높이고 추켜세우는 영은 악의 영이요 성령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큰 권능을 행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 전에, 그가 하는 말이 진정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의 말과 행위에 성령의 온유함과 자비함이 나타나는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828 13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