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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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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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19-02-19 ㅣ No.127716

 

 

사실 따지고 보면 누구나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정말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지금 당장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려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누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일찍 떠나고 조금 더 늦게 떠나는 그 차이이지 하느님 나라 가는 건 매 일반일 것 같습니다. 저는 세상 나이로 보면 이제 마흔하고도 여덟, 예전 같으면 공자는 나이 오십을 하늘의 뜻과 명을 안다고 해서 지천명이라고 했는데 이 년의 세월이 흘러도 하늘의 명을 알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나이로 보면 세상 사람들은 한창 나이라고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가는 게 실감이 납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날은 시간이 가면 반드시 다가올 텐데 그 전에 제 영혼이 갈 천상의 집으로 갈 준비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준비를 해놨을까를 생각해보면 어떨 때는 정말 아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길지도 않은 짧은 세상에서 자신이 한 세상 걸어간 삶에 따라 자신의 영혼의 운명이 영원의 시간 안에서 결정이 되는 것이니까 하루하루의 삶과 시간을 그냥 허투루 보낼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저는 더더욱 지금 이 한순간의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를 느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이 한 인간 개인의 영혼이 나중에 하느님 대전에서 심판의 두려움을 생각해서 두렵다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심판을 두려워한다기보다는 항상 그런 걸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잘 다스려야 나중에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질 때 불행한 영혼이 되고 싶지 않기에 매순간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됩니다. 만약 지금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해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님께서 보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어쩌면 저의 이런 생각에 의아해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의 강의를 평화방송에서 보게 되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미있게 표현해보면요 재미있게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살아가는 게 좋은 거라고 평소에 강의에서 말씀하시는 걸 보면 제가 참 한심한 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황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그냥 세상을 흥청망청 살아가는 그런 식의 삶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부님 강의의 초점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세상도 재미있게 살면 더더욱 좋다는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신부님 강의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부님의 철학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정말 저처럼 허구한 날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정말 세상살이의 힘든 일도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라며 이것도 마치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그걸 달게 받아들여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훌륭한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에서 본다면 정말 그런 고달픈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만약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쩌면 하느님을 곡해를 해도 너무 많이 곡해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정말 인간의 존재가 너무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한낱 힘 없는 피조물이 그런 삶을 살려고 창조되었다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 답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그 답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단지 한번 상상을 해 볼 따름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삶의 희노애락이 있을 겁니다. 사랑은 평온할 때만 생기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이런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주신 최고의 상위 개념의 계명이 사랑인 걸 보면 삶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훈련장이지 않을까 말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비록 세파에 찌든 삶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런 세파가 영혼을 담금질하는 용광로처럼 되어 정금 같은 순수한 영혼을 만드시려고 각자의 삶에 십자가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난의 삶에도 희열은 있습니다. 언제 희열이 있을까요? 바로 그런 고난을 잘 극복해서 이겨냈을 때 느끼는 희열입니다. 마치 험준한 산을 등산해서 힘들게 힘들게 한발씩 내디뎌 마침내 산 정상에 우뚝 섰을 때 그때 느끼는 희열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를 때는 정말 힘들고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이 따를 수도 있지만 산 정상에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져 있는 자연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마지막에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 왜 자신의 지상에서의 삶이 왜 그랬는지와 또 그때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을까를 한번 상상해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주신 삶이 정말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시한부의 인생을 사는 그런 존재로만 생각한다면 정말 불운한 삶일 수도 있지만 생각을 좀 달리 해서 자신의 삶이 시한부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하느님 앞에 겸손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 마음을 닮은 영혼이 되어 나중에 하느님계신 곳으로 와 주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인생의 삶을 시한부 삶으로 인식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영혼에 유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입니다. 시한부의 삶은 정해진 삶이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미 그 시간이 되면 모든 게 끝나는 시간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모든 게 정말 끝나는 영혼이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시한부의 시간이 한계가 없는 영원의 세계로 옮아가는 시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정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말 시한부의 삶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 건지 아니면 시한부의 삶이지만 정말 하느님께서 주신 삶의 시간과 이 시간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셨을 때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선용했는지에 대한 결과로써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천상복락을 누리는 영예를 가질지 운명의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면 결국은 선택은 자기가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삶을 사는 게 현명한 삶일까요? 저는 이런 삶을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록 시한부 인생을 사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잘 선용해서 다음에 하느님과 영원한 시간 속에 사는 삶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세상을 사는 게 현명할 거라고 봅니다. 그냥 두서없이 제 생각을 한번 말씀드려봅니다. 그냥 명확한 건 아니지만 한번쯤 묵상거리는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글 읽으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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