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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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알기 / 제3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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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141774

 

성경바로알기 2020.10.30..

(공동번역성서)

3의 시선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6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로마8:3-6)

 

 육체, .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과연 그 영과 육신 이런 것들이 무엇이기에 하느님은 육신을 그토록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보겠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기역사 만들기, 자기역사 쓰기입니다. 내 역사 만들기, 내 역사 쓰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아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뭔가를 새겨두고 가고 싶어 해요. 나를 연필 삼아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나를 새기고 싶어 해요. 이게 자기역사 새기기, 자기역사 쓰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이 말이 역사 보편에 격언이 되어 있어요. 어느 민족, 어느 때, 어느 장소에 가도 이것은 아주 보편적 격언이에요. 아주 가치 있는 금언입니다. 정말 이름을 남기고 가는 그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하늘에서도 그렇게 취급을 해줄까요? 그런 연유에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총동원해서 나 살아있음. 나 가치 있음. 나 존재하고 있음. 이것을 증명하는 데에 올인을 합니다. 나증명하기. 그런데 그 방법도 참 여러 가지에요.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고요, 대단한 명예를 얻어서 나라는 존재를 이 역사에 새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훌륭한 인격을 자랑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요. 열심히 인격을 연마(硏磨)하고 도야(陶冶)하여야, 나는 이렇게 살았어. 여기까지 성숙 했었단다, 이렇게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 성숙한 인간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역사가 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나 가치 있음.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스스로 살겠음. 이리로 전부 수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교육의 커리큘럼이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효율적으로 살 수 있는가, 가치 있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멋진 이름으로 살아가다가 괜찮은 이름 하나 남기고 떠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어요. 그게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기 구원의 내용에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구원하려고 삽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살아요. 사는 기술. 살아남기 위한 훈련, 끝까지 자기 힘으로 한번 살아보기. 요거를 배우고 실천하다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산 자가되어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을 두려워하거든요. 그게 너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서 그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조금 상쇄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자기가 이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스펙을 좀 쌓아서 그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그 스펙을 들이밀면서 그 두려움을 조금 해소해보고자 하는 거죠. 열심 있는 종교생활, 도에 넘치는 선행과 구제. 청빈과 청렴. 인류에 대한 공헌과 기여, 훌륭한 학식 등등. 모든 인간이 그 죽음 너머의 어떤 삶에 대해서 음으로 양으로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자신들이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쌓아놓은 그 스펙들이 그 죽음 너머의 삶 속에서 자신들을 유지시켜주고 지탱하는 데에 쓰이는 자가발전기의 배터리의 충전양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걸 열심히 내가 이 땅에서 스펙을 쌓아서 내 자가발전기의 충전기에 이렇게 쌓아야 훌륭한 인격, 착한 일, 멋진 종교행위 이런 걸 내 스펙으로 쌓아서 내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거죠. 그래서 그 너머의 삶을 준비한다니까요.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자가 발전기 배터리 충전이 잘 되어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거고, 누가 봐도 허접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은 거의 방전이 되어 있는 배터리를 들고 서 있는 초라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거예요.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이런 말이 거기서 나온 거죠? 대연각 호텔에서 팬티만 입고 탈출한 그 여자를 매일 예를 들면서 그런 구원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끄러운 구원. 정말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요. 여기서 난 자랑스러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모든 인간은. 내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어떻게 저를 구원하셨어요? 라는 이 부끄러운 구원받는다니까요..

그럼 예수님 옆에서 벌거벗겨 죽은 그 강도는 진짜 천국 저 변두리에서 개털 모자 쓰고 살고 있겠네요? 뭐 한 게 있어야지? 평생 강도질만 했으니까.. 그러는 겁니까? 심지어 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그러한 인간의 자가발전 충전이 신앙의 내용인 양 가르치고 배워요. 그게 차등 상급론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만약에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저는 안 갑니다.

천국에서도 우리의 육이 행한, 내가 행한, 내가 내놓은 업적과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열매들에 의해서 나의 가치가 매겨지고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삶이 차등 있게 주어진다면 거긴 곧 지옥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도 심지어 십자가마저도 자기 스펙 쌓기의 도구로 이용을 해요. 훌륭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리저리 그 십자가, 믿음을 휘둘러 댄다니까요. 거기에서 충분한 자기만족도 얻어내고 너희는 그것밖에 안 되냐? 그렇게 해서 자기만족도 얻어내고 그 자기만족에 부응하는 하느님과 세간(洗肝)의 평가도 은근히 기대하죠.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복음은,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를 이용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자가발전 충전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 십자가와 예수, 복음을 주신 게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소품으로 사용하시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나오죠? 내가 내 영광을, 내 독사, 이걸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하라!’ 그런다니까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도록 지어졌어요. 심지어 저 절의 스님, 달마대사, 석가모니까지도. 그 말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계시하는 삶을 살게 되는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 하느님 아님, 나 하느님의 영광 드러내는 소품임 이걸 깨닫는 그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그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느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선악과 먹고 하느님처럼 된 자임, 그러니까 나는 내 자존심 챙겨야 됨..’ 요걸 증명하는 데에 모든 노력과 열심을 다 쏟아버리면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그 하느님의 영, 말씀, 진리가 떠나버린 죽은 흙이 생산해 내는 흙의 所産밖에 안 나타나요.

그건 그 진리, 그 복음, 그 영, 그 성령 없는 다른 이들, 타종교인들, 혹은 무신론자들, 세상 사람들도 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열매들이라니까요. 그게 우리의 가치관으로 우리의 세계관으로 선하게 보이던 착하게 보이던 그 영이 없이도, 그 진리가 없이도 해낼 수 있는 그런 건 전부 땅이 내놓는 소산이에요. 나쁘다는 거 아닙니다. 그 영을 가지고 하는 거와 그 영이 없이 그냥 흉내 내는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거예요. 그건 하느님 흉내라니까요. 그러한 죽은 흙들이 내놓는 것을 하느님이 저주받은 흙아 네가 내놓는 것은 전부 가시와 엉겅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진리의 영, 그 성령이 없이 인간들이 내놓는 모든 것,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내놓는 모든 것은 가시와 엉겅퀴에요.

예언서에 보면 하느님의 법을 떠난 이스라엘, 율법주의에 묶여버린 이스라엘, 그 안에 뭐가 가득 찼다 그래요? 가시와 엉겅퀴.. 그들이 열심히 뭔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데 열심히 자기들의 업적을, 스펙을 쌓고 있는데 그게 다 하느님이 보기엔 가시와 엉겅퀴일 뿐이에요.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의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세상에게도 쓰일 때가 있어요. 하느님의 언약, 하느님의 말씀. 그것이 완성되면 그걸 그렇게 써 놓고 말씀의 완성이라고 써 놓고 무트’,‘죽음 이라고 읽는다고 했죠? 히브리사람들은. ‘타우의 합성어에요. 말씀의 완성, 진리가 완성되었다, 라고 써 놓고 글자는 그렇게 써 놓고 죽음이라고 읽어요. 무트 타무트. 이렇게.

그래서 천국에는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다, 그러는 거예요. 다나토스로 내려갈 때 우리가 아프니까. 그게 사망으로 끝이 나는 이 세상이란 말에요. 그런데 성도는 다나토스, 진리로완성이 되어 그렇죠. 저는 하느님이 창조하셔야 비로소 존재가 되는 피조물이죠. 라고 그 다나토스, 올바른 다나토스로 완성이 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잘 할수 있어요. 한번 맡겨보세요. 내가 하느님이 원하는 그 수준까지 한 번 성장하고 성숙해 볼게요. 라고 시퍼렇게 살아서 비 진리로 완성되는 이가 있어요.

그래서 진리로 완성이 되면 다나토스로 죽어 생명으로 즉시 그 다나토스가 환원이 되지만 비 진리로 완성이 되어죽으면 그게 네크로스, 완전한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문선명 씨가 죽으면서 그랬다잖아요? 다 이루었다. 그 다 이루고 네크로스로가는 거예요. 비 진리로 완성되는 거라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 아담들의 본성은 내 죽음을 기뻐하지 않아요.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능적으로 남의 죽음을 통하여, 남을 죽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도록 되어 있어요. 그거는 세상의 본성이에요.

잘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힘들죠?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랑은 상대도 안 되는 어려움을, 고통을 당하는 어떤 이가 나타났어요. 그때에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고통에 내가 참여하여 그와 같이 그 아픔을 겪습니까? 아니면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라고 먼저 나를 위로합니까? 상대의 죽음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니까요. 이거는 인생의 본능인 거예요. 나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하느님을 죽여 온 세상이 위로를 얻었죠? 온 세상이 합의하여 하느님을 죽이고 지들이 위로를 얻었다니까요. 그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세상을 기고만장하게 살려 버렸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다 죽은 자다, 라고 선언을 해버리셨다니까요. 그거예요.

하느님은 그 장자 안에 우리 장자들을 넣어서 이 세상에 보내세요. 그리고는 세상에 뜯어 먹어라! 애기들 죽일 테니까 너희들이 애기들의 죽음을 보고 위로 얻으라는 거예요. 힘 얻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살찌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항상죽는 자로 나타나고 그들은 항상 우리를 뜯어 먹는 자로 나타나요. 그래서 심지어 시편 73편에 보면 그들은 죽을 때도 때깔이 좋아요. 얼마나 먹었는지 눈알이 튀어나왔다고 그래요. 살이 쪄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세상에서 세상의 먹이로 살게 되어 있어요. 구차하게 비리비리하게 무슨 뭐 직장도 별로 이상한 거, 그런 거 갖게 되고 가난하게 살고 아프고 이런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느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배터리를 검사하면서 너 세상에서 너희 배터리 얼마나 충전해갖고 왔니? 그만큼 상 준다. 요렇게 심판하는 분이 아니란 말에요. 오히려, 네 배터리 방전됐어? 아직 남았네?그럼 넌 탈락, 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이 돼야 하늘의 에너지로 그걸 채울 수 있어. 그게 생명이고 그게 영생이야. 그렇게 오히려 우리의 배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방전이 되는 것을 하느님은 기뻐하시고 기다리시지, 네가 얼마만큼 충전해 갖고 왔느냐를 보시고 상을 주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하늘을 사는 에너지가 못 된다니까요. 다 땅의 것, 아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영과 육이 계속 반복되어 대조가 되어 나와요. 거기서 쓰인 육체라는 단어가 사륵스이고 거기서 쓰인 성령이라는 단어가 푸뉴마예요. 이거는 성경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대조예요. 영과 육, 사륵스와 푸뉴마. 그런데 성경은 그 육체, 사륵스라는 단어와 몸, 소마라는 단어와 푸쉬케, 이 단어를 막 혼용해서 육, 육체, 몸 이렇게 번역을 해 놔서 우리가 헛갈려요. 그런데 헬라어는 정확히 구분이 되어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성경에서 영이라고 번역이 되는 푸뉴마라는 단어는 관사가 없이 쓰이면 심령, 마음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라고 번역이 된 그 어구는 사실, 호 푸뉴마 거든요. 푸뉴마에 관사가 붙으면 마음 심령이 아니라 성령, 혹은 진리, 말씀이라고 이렇게 번역을 해요. 그러니까 에이스 호 푸뉴마, 내 마음 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것에 갈급한 자, 이라는 뜻이에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게. 그런 차이가 있단 말에요. 그 푸뉴마, 그 심령, 그 마음. 그건 하느님의 마음이거든요. 그 마음을 가진. 그 푸뉴마를 가진 이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성경이 불러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담아 그릇에 주시잖아요? 레마를 담아 로고스를 주시는 것처럼. 진리를 담아, 하느님을 담아 성전을 주셨는데, 율법을 주셨는데, 그걸 그냥 그대로 표피적으로만 이해하여 내가 가지면 그게 바로 악한 거예요. 고걸 사륵스라고 한다니까요. 고걸 비 진리라 그래요.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거, 깨달아지지 않은 거. 이게 육체에요. 이게 비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몸은 뭐예요? 성경에 나오는 . ‘소마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념이에요. 그 몸은 은혜에게 점령당하면 은혜의 몸이 되고요, 죄에게 점령당하면 죄의 몸이 돼요. 그리스도에게 점령당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까 몸, 이걸 막 육신, 육체 이렇게 또 번역을 해 놓아 갖고 이것도 헛갈리는데 , ‘소마는 그 자체로는 그냥 그릇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의해 얘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몸, 소마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소조예요. 구원. 이 몸은 어떤 거에 의해 구원이 되느냐에 의해 가치가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소마라고 해요.

(골로새 1: 18) 18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보세요, 그리스도가 근본이라니까요. 그런데 전부 우리는 우리가 근본이고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모두 다 내가 이용해 먹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게 근본이란 말에요. 그런데 여기 보면 소마라는 단어를 쓰고 그리스도의 소마라 그래요. ‘크리스토소스 소마‘, 그러니까 이 소마는 좋은 거란 말에요. 여기서는. 몸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이 소마가 사륵스, 비 진리로 채워지면 그 몸은 그냥 사륵스, 육체의 몸, 죄의 몸이 돼요. 남아 있어요.

이 몸이 푸뉴마로 채워지면, 은혜로 채워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푸뉴마에 의해 흡수가 돼버려요. 이 몸이 이리로 함몰된다 그래요. 그래 갖고 더 이상 그 몸은 멸해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요. 그러면 단죄의 대상이 되는 몸이 없어지는 건 반드시 푸뉴마가 그 몸을 채워야 되는 거네요? 진리가, 그 마음이 그걸 채워야 되네요? 그래眞理가 된 몸은 하느님 앞에서 해져서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斷罪함이 없게 되는 거고, 그 상태를 容恕라 그래요.

 

(로마 6 : 5-6)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로 살 때, 죄에게 점령당한 죄의 몸으로 살게 돼요. 그게 육체, 사륵스에요.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점령하게 되면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동시에 영으로 함몰되어 들어가 버린단 말에요. 그걸 바오로는 죄의 몸이 죽어버리는 것이라고 하고 그러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그 육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죄의 종으로서의 그 몸이 삭제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난다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면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고 해요. 거기에 쓰인 단어가 사륵스인데 율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사륵스라고 부르죠? 육체라고 그래요. 비 진리라 그래요. ? 당연하죠.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그런데 세상이 그 율법으로 오신 주님을 통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냥 율법이 되는 거예요. 진리를 담고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진리로 봐주지를 못해요.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육체로 오셨다 그래요.

3절을 보면 율법이 연약하여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하시기 위해 그분을 육체로 보내셨다 그러거든요. 그러면 율법이 연약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율법이 하려고 했던 거는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그러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 때 율법이 있었어요? 성문화 된 건 없었지만 하느님이 내리신 말씀이 있었다니까요. 하느님이 너, 세 번째 제물 준비해. 셋째 것으로 준비해.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덜렁 삼년 된 걸 갖고 오더니 반으로 바탈’, 쫙 쪼개버렸어요. 그랬더니 하느님이 카라트라는 이 선을 두고 넘어가 버리셨죠? 이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인간은 생래적으로 에피뚜미아라는 이 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너, 나에게 뭐 가져와 봐. 내가 기뻐할만한 제물 가져와 봐, 그러면 예수를 가져가야 되는데 그러면은 우리는 내가 선하다, 악하다, 라고 생각한 어떤 것을 하나를 정한 다음에 그걸 하느님에게 쫙 쪼개서 갖다가 바친단 말에요.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거 안 된다고 성경 전반에 걸쳐서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때에 그게 희생제사요, 이스라엘의 율법지킴이었잖아요. 하느님이 그걸 죄라 그랬단 말이에요. 율법 시대에는. 그런데 모세가 오기 전에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게 죈데 야단을 안 치신다니까요. 죄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로마서512절에도 나오잖아요.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그 에피뚜미아, 두 마음이 뭔지를 글로 써서 설명해준 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너희 양심, 그 마음이 율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를, 그게 뭔지. 그게 왜 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써 준게 율법이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죠?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걸 죄로 여기지 않는대요. ?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야단치지 않은 건 하느님은 그가 그렇게 한 것을 야단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란 말에요. 모든 인간이 그걸 그냥 당연한 거, 바오로가 내가 탐욕이, 율법이 탐심이 죄라고 얘기 안 했으면 내가 그 탐욕이 죄인 줄 진짜 모를 뻔했다.’그러잖아요.

 

인간들은 이제 확실하게 그들의 율법지킴, 유대주의가, 율법주의가, 바리새인이, 제사장이 예수를 죽였잖아요. 하느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그 율법지킴은 자가 발전기 충전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 살해 행위였다는 게 폭로가 된 거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율법의 일을 역할을 잘 하신 거네요 그죠?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러 오신 거지,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산으로 올라가 입을 열어 율법은 이런 거야. 라고 하면서 십계명 뒤의 다섯 계명을 말로 설명해주시죠? 율법이 내려와서 이게 사실은 이런 거야, 라고 진리로 해설까지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들이 그걸 못 알아보고, 이 생명을 못 알아보고 죽여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 세상의 한계라는 거예요. 이것이. 절대 인간들은 그걸 못 알아보게 되어있다니까요.

그래서 율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셔서, 성전으로 오셔서 그들을 완전한 죄인으로 확증을 하고 죽어버려요. 너희들의 수준이야. 그것이. 그것이 너희들의 정체야. 너희들의 실체야. 너희들은 절대 생명을 포착할 수도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계시해줘야지. 네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걸 뭐라 그래요? 신의 죽음이라 그래요. ? 신은 피조물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 신이라는 이름을 가져요. 그런데 이 신이 피조물에게 포착되기로 결정하고 내려와서 자기를 계시하면 이거를 신의 죽음이라 그러고 이걸 십자가로 그려준 거뿐이에요.

너무 신파적으로 내 죄를 위해서 그분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서 죽으셨대. 이렇게만 알고 계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내 밖의 십자가고 내 밖의 예수라니까요. 그래서 수시로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믿어졌다가, 믿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내 죽음이 아니면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아무 상관.

(요한복음 1522)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 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보세요. 율법이 와서 이게 죄야, 라고얘기 안 했으면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요. 그러면 어느 때는 죄로 여기지 않는데 어느 때는 죄가 되고 이거는 형평상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는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게 되면 그 죄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았을 땐 그걸 그대로 그냥 받아들여 버리면 그게 죄가 되어 죽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율법으로 왔어. 그래서 말을 했다. 말을 했으니까. 율법이 지금 말로, 진리로 전해졌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 그러면 사륵스로 이걸 취급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죽여 버린 거거든요. 그러면? 그게 죄라는 거예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텐데 진리가, 율법이 와서 말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었지? 그게 죄야! 그게 죄야. 그럼 다 죽어야겠네요? . 모든 인간이 하느님 살해범으로 선고된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하느님의 택한 자들에게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찾아가시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으로 찾아가시는 거예요. 진리를 진리로 못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마저도 그냥 사륵스, 육체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그 육체에 죄를 정하여 죽여 버린다니까요. 세상이. 그런데 그건 하느님의 의도였단 말입니다. 온 세상을 죄인으로 합당하게 선고해 버리기 위해서. 하느님은 절대로 세상에게 포착당하지 않아요.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들의 지혜나 지식으로 하느님을, 그 하늘을, 묵시 세계를 포착할 수가 없어요

보세요.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했어요. 자기를. 요한복음 1장에서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럼 생명나무 열매는 거기에 있었네요? 생명나무 열과가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했단 말입니다. 아무도 그거에 손 안 댔다니까요.

그 생명이요, 진짜 진리인 그 생명이라도 그게 내 밖에 있으면 그것이 나를 구원 못해요. 아니, 이스라엘 전체를 예수님이 이리저리 여행 다니면서 그 생명이 왔다 갔다 눈앞에서 보여줬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니까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그 안으로 생명이 되어 들어오시려고..

그렇게 이 氣息하는 존재, 기식한다라는 건 들 숨, 날 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는 거죠. 밖의 것이 내게 들어와서 그게 내 생명이 되면 그걸 푸쉬케라 그래요. 그걸 성경이 그냥 육신, 육체, 목숨 이렇게 막 번역을 해버려 갖고 이것도 굉장히 헛갈리는데 푸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랑 똑같은 단어거든요. 우리가 존재하죠? 존재하는데 밖에 들어오는 들숨을 끊어버리면 죽죠. 밖에서 들어오는 양식을 끊어버리면 굶어 죽지 뭐. 밖에서 들어오는 물 끊어버리면 죽죠? 그럼 나의 생명의 근원은 밖에 있네요? 요걸 푸쉬케라 그래요. 그런데 이 푸쉬케가 그 진리를 내 안에 푸뉴마로,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게 내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밖에서 아무리 끊어도 안 죽잖아요? 그걸 영생이라고 한다니까요.

 

(고린도후서 33) 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켜 써 보내신 소개장입니다. 이 소개장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령으로 쓴 것이며 석판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입니다.

오직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석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석판에 쓴 것이 아니라? 석판은 먼저 생각나는 게 뭐죠? 시내산 위에서 하느님께서 계명을 써주신 그 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돌이라고 그러죠? 뜨인 돌, 산 돌, 모퉁이 돌, 흰 돌. 그래서 돌이 떡이 되어 우리에게 온 거예요. 먹이로. 그리고 그걸 진리라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시잖아요?

그런데 석판에 새겨버리면 어떻게 되죠? 예수가 그냥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되어지면 석판에 새긴 거예요. 예수라는 분이, 그가 그냥 하신 말을 그래? 그대로 지켜야지. 오리 가자고 하는 이들에게 십 리를 가줘? 그래 그렇게 가 줘야지. 왼편 뺨 때리면 오른편 뺨 대줘? 아이 그래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그 석판에 새긴, 석판이, 돌이 한 말, 그걸 껍데기로만 보고 그리고 그 돌이 행한 그 일. 2천 년 전에 나를 위해 그분이 죽으셨대, 라고 내 밖의 어떤 사건으로만 갖고 있을 때 성경이 나에게 석판에 새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뭔지를 알아 아, 그거! 그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내 마음에 생명으로 오시는 그 예수, 그 은혜, 그 사랑, 그 능력? 하고 내 마음으로 갖게 되면 이게 심비에 새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밖에 오리 가자고 하는 놈한테 십 리 가주라는 이 법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게 되는 거잖아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거예요. 그걸 심비에 새겼다고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슨 성경 지식이나 이런 거를 대단히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거 줄줄줄 외워서 여러분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직면했을 때, 말씀을 떠올려서 그래 그때는 요렇게 대처해야지, 요렇게 대처해지, 이거다 쓰레기예요. 성경은 그렇게 읽으라고 우리에게 준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하느님의 말씀, 그 설교를 통하여 그렇지, 저 모든 게 다 그거, 그거를 설명하는 거지, 라고 여러분이 알고 있으면 아브라함을 아브라엄으로 읽어도 돼요. 그렇게 알고 있어도 아무 상관없어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단 몇 구절을 통해서도 갖는 사람이 있어요. 그때 그를 생명이 있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가 있는 자라고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성경을 무슨 성경신학이다, 조직신학이다 해서 이렇게 풀고, 저렇게 풀고, 좋아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줘야 되죠. 그런데 그냥 거기서 머물러 버리면 그것, 그 진리, 그 사랑, 그 아가페, 그 하나로 던져주지 못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리는 이렇게 우리를 뚫고 들어와 우리의 마음이 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계시하는 분이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고 칭찬을 받고 어유, 하느님이 저런 분이었어? 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걸 보고 즐거워하려고 우리를 창조한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를 만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 수준으로 자꾸 생각해요? 그래놓고는, 그거 해드리고 아, 내가 하느님 앞에서 열심히 재롱부렸는데 기뻐하실까? 이러고 있다니까요. 하느님은 네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네 하느님이라는 거만 확실히 인정하고 너는 네 자리로 내려가라는 거라니까요. 거기에서 여러분이 뭘 해 오고 안 해 오고 이런 거는 별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진리를 품어 안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착한 일들 많이 하세요. 왜 안 해요? 아니, 우리도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도 파주고 진짜 공정무역 그걸로 조금 비싸지만 그렇게 수입되어 온 거 그런 거 사 먹자고요, 이왕이면. 그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왜 나빠요? 이게. 하자니까요. 그러나 먼저 해야 할 거 하고 하자는 거예요. 아니 가슴 안 아파요? 그 조그만 아기들이 세상에 발도 안 씻을 물, 그걸로 하루 종일 마시고, 먹고. , 그 즉시 안 죽는 게 다행이지. 그런데 그걸 보고 아무 느낌이 없어요? 아니,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목적지가 그거 아니에요? 착한 사람 되기. 그게 왜 나빠요? 하자니까. 하는데 생명부터 챙기고요.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의 자격 여하에 관계없이 오로지 당신의 언약만 우리 안에 생명을 쑤셔 박으시기 위해 율법과 성전을 주신 거고 그걸로 안 되니까 율법과 성전으로 말하는 예수를 보낸 거예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하느님의 의도였어요.

너희들은 내가 불순종에 가두어 놨어. 죄에다가 가두어 놨어. 그게 그냥 피조물이야. 그게 피조물의 한계야. 그래 세상 속에서 너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거기서 빠져나와 봐!’, 역사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하면 하느님이 아닌 분이 되는 거예요. 아무도 못 빠져나와야 돼요.

하느님이 가둬놨는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거기서 빠져나옵니까? 하느님이 죄와 불순종에 가둬놨다며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못 빠져나오면 살려주세요. 밖에서 나를 꺼내 주셔야죠.’ 이게 나의 죽음이잖아요. 다나토스의 죽음. 그리고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먼저. 그다음에 할 거 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담고 온 성전, 옛 성전, 율법, 예수. 이것이 육체에 머물고 비 진리로 그냥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로 이해 돼지 않았어요. 그건 모형이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진짜 그 안에 든 진리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모형은 반드시 부정되고 깨져야 되죠? 사람들이 그 모형을 진짜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AD 칠십 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성전은 깨지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돌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그 모이 돌이, 깨진 거고, 그 안에서 율법, 석판이 깨진 거예요.

그런데 옛 성전, 예수, 율법은 전부 진리, 하느님. 그러면 그게 깨져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영으로 들어왔다면 성전, 예수, 율법이 깨진 게 하느님의 죽음. 신의 죽음. 이게 십자가로 우리에게 그냥 설명되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성경을 너무 신파적으로, 그리고 도덕책, 윤리책으로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나에게 생명이, 그 마음이 내 마음에 새겨진 거구나, 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온 거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게 또 나의 부정이고 나의 죽음이네요? 그러니까 그 하느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니까 나는 구원에 이른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그게 내 거가 되지 않으면, 내 밖의 것으로 존재하면 늘 헷갈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이것 하고, 저것 하고,이것 안 하고, 저것 안 하고 한 그것에 늘 시달리게 되어있어요 내가. 불안하게, 고통스럽게. 그게 뭐 자유예요?

그러한 우리의 성도의 목표지점은 비 진리의 측면에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거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용납이 안 돼요. 그리스도교의 목표지점이 믿음을 가진 자들아 이 세상에, 이 사회에, 이 이웃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자가 되자. 이거 아닙니까? 그건 야, 복음으로 열심히 살아,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보여 줘. 이거 아닙니까? 목적지가 잘 못되어 있어요. 그걸 하마르티아, ! 교회는 그걸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믿음, 신앙, 십자가, 말씀을 갖고도 내가 얼만큼 훌륭하게 살아있는지 볼래? 이걸 증명하려고 해요.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15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서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가 다나토스예요. 이 다나토스는 우리가 부정되는 거죠. 하느님이, 그분의 영광이, 그분의 하신 일이 드러나는 게 다나토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렇게 죽는 거를 싫어한다고요. 오히려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나는 이 정도 할 수 있어요, 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그렇게 죽기를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육체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사망으로 우리를 품어 안고 죽어버리시는 거예요.

다나토스로 죽고 다시 삶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인정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라는 게 인정된 거니까. 그게 그 안에서 우리가 죽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진리, 여기에는 마귀를 멸망시켰다 그러는데 이 말은 악한 말, 거짓 증거 이런 뜻이에요. 거짓말. 뭐 검은색 장삼 입고 갓 쓰고 이렇게 나타나갖고 입술 이렇게 뻘건 것 칠하고 그런 거가 아니라, 마귀가. 악한 말. 비진리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진리가 멸해졌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그것에서 풀려난다는 거예요.

그렇게 다나토스로 예수님이 죽어주시고 그것이 나에게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해되고 나니까 에이, 그거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그렇게 해서 칭찬받는 거 아니네, 라고 비진리라 멸해지자 내가 인생의 종노릇에서 풀려나더라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서 214-15절이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교가 인본주의에 먹혀 버리면 완전히 거꾸로 가게 돼요. 뒤집어지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대다수가 그리로 가게 돼 있어요. 여러분은 먼저 진리를 들어야 돼요. 듣고 그걸 마음으로 가져야 돼요. 그리고서 그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그 행함. 그걸 하느님께 내어 놓으면 돼요. 그건 진심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 것으로 카운트 안 되는 그 행함이니까 그거는. 그런데 잘 안되죠? 정말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느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를 죽여가세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죠. 든 율법이 가리킨 게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죠. 그래서 사랑의 이야기를 갖고 예수님이 비유를 드시는 거예요.

율법사가 왔대요. 율법의 대장. 어떻게 해야 영생 얻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니? 이거, 이거, 이거, 이거. 그거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한 거예요. 가서 해. 율법 지켜! 그런거죠. 그러니까. 다 지켜봐.. 그랬더니 지킬게요. 내 이웃이 누굽니까? 지킬게요. 그래 예수님이 나중에 뭐라 그러느냐 하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누가 거반 죽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말씀하세요. 그건, 너는 거반 죽어 강도 만난 자지. 그 몸으로 누구를 가서 사랑하고 그것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것으로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그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이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예요. 하나는 죽도록 일 한 여자,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예수님 앞에서 말만 들은 여자. 누가 율법사냐? 물으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자 내가 비유로 말해줬어. 이제 현실에서 한번 너희들이 골라 봐. 누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냐?

마르타가 예수님을 먹이려고 섬기려고 했다니까요.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뭘 계속 이야기해주고 있고 걔하고만 이바구하고 있네, 예뻐하는 거예요. 화가 났습니다. 주님, 너무 걔만 예뻐하지 마시고요 제가 하는 이 일을 보십시오. 걔도 저와 같은 일을 하라고 말을 해주세요. 그래요. , 오늘날 교회들인 우리에게 하는 얘기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무슨 말만 듣겠다고 저러고 있어? 이러고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얘야 얘가 잘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렸냐? 내가 너한테 밥 달래? 누가 너한테 나 섬겨 달래?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어.. 그런 건 나에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에게 있어 중요한 건, 내가 가져온 이 생명을 누가 받으려고 하느냐? 그 자가 나에게 소중한 자야.‘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루가복음 1041-42)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설명이에요. 이게. 많은 일에 염려를 하고 있는데 너는 그 하나가 결핍되어 있다. 많은 일을 하느라고 그 아가페, 그 마음으로 가져야 할 그 하나를 못 갖고 있구나. 그런데 마리아는 그 하나를 가졌다. 그녀는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그걸 가졌느냐고요.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행하느라 그 하나의 크레이아결핍, 그 속에서 살고 있냐고요.. 하느님은 그 많은 일에 관심 없어요. 어차피 불태워버릴 거 그렇게 열심히 해서 살기 좋은 세상, 공평한 세상 만들어 놓으면 뭐할 거냐고요? 하지 말자는 거 아니에요. 하자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란 말에요. 하나를 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빠진 이 세상은 그 진리를 못 알아먹여야 맞아요.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의 시선에 묶여 있어요. 이 죄인들만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시선들이 있는데 이걸 지금 모아서 총합이 되면 시대정신이라는 세상의 눈이 돼요. 거기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고 평가가 매겨진다니까요. 사람 존재에.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끌려 다니고 그리고 신앙의 가치도 거기에 두네요. 천만의 말씀. 우리를 바라보는 제 3의 시선이 있어요. 하느님의 시선이요. 그 시선은 이 땅의 가시와 엉겅퀴를 보지 않아요. ‘내가 보낸 거, 그 하늘의 것. 너 그거 가지고 있니?’ 그걸 찾으세요. 쓰레기 같은 거 갖고 오지 마. 내가 보낸 거. 내가 준 거. 내가 내 아들에 담아서 보낸 거 있잖아. 그거 줘. 그거 찾는 제 3의시선이 있다니까요. 그 시선을 의식하며 그게 내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시란 말이에요. 그거 있으면 된 거예요.

자유! 법으로부터 여러분이 자유롭게 된 거예요. 그 죄의 몸이 멸해졌으니까. ‘다시는 결코 단죄함이 없다.’ 바오로가 반복하여 이야기하잖아요. 육신의 일은 육신의 생각은 하느님을 기쁘게도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의 원수야. 그 하느님의 원수로 행하는 그거 갖고 와서 주여, 주여 내가 주의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그걸 내 마음 속에 진리로 가져야죠. 그리고 그 하느님이 하신 일에 불현듯 일어나 갑자기 소름 돋으며 박수 칠 수 있는 그 사람이 천국을 사는 거예요. 그거 가지면 되는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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