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스크랩 인쇄

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2-07-22 ㅣ No.156455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게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가라지를 뽑는 것이 좋은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 왕따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지매라고 부릅니다. 약하고, 부족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대항 할 힘이 없고, 도와 줄 친구가 없는 사람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왕따를 경험한 사람은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에는 악플로 괴롭히기도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미리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억지로 마침표를 찍기 때문입니다. 왕따와 이지매가 이념이 되고, 신념이 되면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나치의 독일은 유대인, 집시, 사회 부적응 자들을 포로수용소에 가두었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는 인류와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교회도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시작했었고, 많은 무고한 이방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범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주도하는 미국사회에도 여전히 인종차별로 인한 폭력이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하기도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들은 뽑아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가끔, 제 몸을 볼 때가 있습니다. 지우고 싶은 흉터도 있습니다. 줄이고 싶은 뱃살도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빼고 싶은 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모두 내 몸의 일부이고,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와 함께 계속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삭제하고 싶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역사의 기억을 삭제하고 싶으신지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시간, 이념과 사상의 갈등으로 벌어진 폭력과 전쟁의 시간, 부끄러운 시간, 치욕의 시간, 분노와 미움의 시간들은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죄의 역사의 또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제자들의 배반, 박해와 순교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서 잘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고통과 박해의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통해서도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237 3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