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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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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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2-07-23 ㅣ No.156477

창세기에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때가 되어 비가 40일 동안 내리고 물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면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몇 번을 청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50명만 있다면, 45명만 있다면, 30명만 있다면, 20명만 있다면, 10명만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단 한명의 의로운 사람만 있었어도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야 한다고 했지만 외면했습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은 묵살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이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배가 12척 있습니다.’라는 글을 왕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우리의 바다를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노아의 방주를 만들었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침략이 있을지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1997‘IMF’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가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문들 닫아야 했고, 실직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금모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2007년 태안에 기름유출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로 기름을 닦아 냈습니다. 20년이 넘어도 오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년 만에 청정한 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위기는 파도처럼 늘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본당이나, 시설에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이 사목적인 비전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결실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통합되는 시스템이 구축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듯이, 무한 경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열정, 신념, 헌신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한대로, 열정적인 사목자가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교회에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실 것 같습니다. 참된 신앙인이 50명만 있어도, 45명만 있어도, 20명만 있어도, 10명만 있어도 세상은 좀 더 환하고,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냉담하는 신자들은 다시금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활력이 넘쳐나고, 젊은이들은 다시금 교회의 그늘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름이 지나면 입시철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에는 많은 분들이 치성과 정성과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자신들이 믿는 절대자에게 매달리고 청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가 다르다고 입시철이 끝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볼일 다본 것처럼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사찰과 교회 그리고 성당은 피서 끝난 바닷가처럼 썰렁함을 봅니다. 매달림과 청원의 기도가 있다면,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무엇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인가! 저는 아브라함 링컨의 다음 말이 참다운 기도의 태도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두 팀 모두 성호경을 그으며 게임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기도는 하느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리라, 내가 하느님 편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때로 외롭고 힘든 골고타 언덕길이라도 주님 가신 그 길을 기쁨으로 따라나서는 것이 참다운 기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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