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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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축일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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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bukhansan] 쪽지 캡슐

2017-01-29 ㅣ No.212067




은경축일 유감

 

 

은경, 금경축일이 서양의 교회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의 은혼식 금혼식 풍습을 따라 생긴 전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께 영육을 모두 봉헌한 사제, 청춘을 사르고 한 생을 바쳤습니다. 서품을 받고 25년간 사목을 폈습니다.

신자들이 아니고 누가 그 분들의 노고를 찬미하고 위로해 드리랴.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 고린토전서 7:32~33 -

신도가 성직자를 공경함은 본분이고 도리입니다.‘빵으로만 살 수 없는인간에게 말씀을 전하는 분은 부모와 같습니다.

 

 

신자, 수도자, 동료와 선후배 사제..... 가득히 모여 정과 흥이 넘치는 축하잔치를 벌입니다.

만군의 천사들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가운 데 성가대의 축가가 울려 퍼지면 꽃을 든 화동을 필두로 각 단체장을 비롯해서 남녀노소 줄을 서서 선물을 바칩니다. 음식이 넘치고 자본주의 나라답게 빳빳한 지폐봉투가 성전 입구 양쪽에 내 놓은 봉헌궤에 수북이 쌓입니다. 요즘은 전보다 좀 덜합니다만....

 

 

30여 년 간 본당에서 안 해본 게 없이 봉사를 해 오고 있는 60대 노 신자도 50대의 주임신부 은경축하 행사를 치르느라 종종걸음입니다. 그는 몇 해 전 환갑을 맞았지만 요즘 누가 환갑을 해 먹느냐고 자식들의 성화를 칠순이나 해 먹자고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과수댁으로 평생을 생선다라를 머리에 이고 자식들을 길러낸 꼬부랑 할머니도 잔치 돕느라 신이 났습니다.

 

 

왠지 그 흥겨움 속에 뭔 가 좀 낯섭니다. 속과 겉이 하나같질 않습니다. 아름다운 일이고 기쁜 날인데 편 칠 않습니다.

사목자의 은경축일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이고 만경창파에 일엽편주로 반백년 고해(苦海)를 헤치며 살아 온 폐품 수집을 하는 신자 할아버지는 말석에서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고 일어섭니다.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도 소명입니다.

차라리 33주년이라면 각별한 의미를 갖출 수도 있지 않았을까? 수단의 단추가 서른 세 개이듯 예수님의 33년 생애를 상징하는 전례행사였으면 그럴듯한 의미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의 대리자로, 사랑의 전달자로서 살아 온 은경축일을 맞이하는 사제들은 때로 고운 전통 한복을 입습니다.

1962<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신 교황 요한 23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서 제대를 향하여 입당하실 때 사람이 교황을 태우고 메고 가던 가마를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분은 공의회를 일러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종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왕은 AD 320경 사람입니다. 그에 의하여 핍박을 받던 교회는 국교가 되었고 교회는 그로부터 1600년간 제정일치의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1(1978.8.26-1978.9.28)는 교황을 성직자로서가 아니라 왕으로 상징화하였던 화려한 대관식(戴冠式) 대신에 간단한 즉위미사를 통해 팔리움’(pallium)을 받았습니다.

즉위 26일 만에 침대 위에서 평화롭게 영면하신 교황은 신체장애자를 위한 원호기금 마련에 교구 내 각 성당의 금은제 성구류(聖具類) 매각을 허용하면서 "교회의 참된 보배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교황은 세속 권력의 상징인 삼중보관을 뉴욕 경매에 내놓아 그 수익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복이 가마나 삼중관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고운 바지저고리에 마고자를 입고 꽃다발과 선물더미 그리고 현금봉투가 그득 들어 있는 봉헌궤짝 옆에 서 계신 평소에 그리도 존경해 마지않던 신부님이 자꾸만 작아 보입니다.....

 

 

교회 신문에는 년 중 은경축일 행사 보도가 온갖 경하의 문구를 곁들여 끊이지 않습니다. 콧날이 시큰 해 지도록 사제를 공경하는 정성이 넘칩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봅시다.

이 시대에 이미 극복 되었어야 할 교권주의의 부활을 보는듯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가난한 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교회가 아니라 있는 자들에 더 가까이 있는 교회가 아닌지.

어차피 성교회도 시대에 따라 전제군주시대에는 교권주의로, 계급사회에서는 성직자 우월주의로,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는 역시 돈 냄새를 맡는 교회가 되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떠나간 교회, 있는 자들의 친목단체로 전락한 봉사단체 그리고 그 안에서 흰 구름처럼 떠 올려지는 사제.......! 어딘가 남의 집에 잘못 들어 간 것 같은 마음자리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잔치에 가난하고 지친 교우들이 몇이나 참석을 했을까...... 왔다가 저 귀퉁이에서 머뭇거리다 돌아가진 않았을 가?

축하의 잔치도, 위로의 잔치도, 감사의 잔치도 아닙니다. 저들만의 잔치입니다.

 

 

내미는 손의 無恥함이어! 잡는 손의 自尊 없음이어!’- 변영로(卞榮魯)수주수상록(樹州隨想錄)’p.19 (4287.11.15.서울신문사발행)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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