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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곡] 봉선화 - 김형준 시, 홍난파 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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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원 [lion77] 쪽지 캡슐

2018-01-21 ㅣ No.28133



 

가곡 〈봉선화〉를 작사한 김형준은 홍난파와 이웃에 살았는데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김형준이 살던 집 울안에는 봉선화 꽃이 가득했는데

봉선화를 보면 그는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0년에 홍난파는 《처녀촌》이란 단편집을 내면서

그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는데 뒤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임으로써 가곡 〈봉선화〉가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만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당시 김천애()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있었다.

그는 1930년 후반 일본의 무사시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42년 봄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신인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선발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보내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섰다.

 

예정된 노래를 부르자 앙코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에 답해서 그는 가곡 〈봉선화〉를 부른 것이다.

청중석의 교포들은 너무도 감격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난 후 분장실로 달려간 교포들은 그를 붙들고 울어 흰 치마저고리가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그후 귀국한 김천애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소복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 노래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유한 것이다.


봉선화〉에서는 이 비애를 넘어서 부활해야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숨쉬고 있다.

즉 비록 겨울이 닥쳐와서 모진 눈바람에 형체마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혼백만은 결코 죽지 않고 길이 남아서 찾아온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폐부를 찌르는 비원의 시구가 있어 이 노래가 단순히 애수어린 가곡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노래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른 김천애는 훗날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꼭 고향에 돌아가서

〈봉선화〉를 부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평안남도이다.

 

참고가 되시기를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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